주일오전설교
설교본문 | 롬13: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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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6-22 |
주일오전설교 250622 사랑은 율법의 완성
본문: 롬13: 8-10
제목: 사랑은 율법의 완성
I. 서론
로마서 13장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1-7절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지 우리가 복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1)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하라
본문 8절에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실제적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돈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을 남에게 빌리면 안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집을 사는데 대출받는 것도 안될까요? 무언가 빌리는 순간부터 빚을 지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 아무것도 빌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7절 말씀이 8절의 배경이 됩니다. 8절은 절대로 빚을 지지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빚을 졌다면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세금이나 대출이나 빚을 진 것이 있다면 내야 할 돈을 제때에 갚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성도들 간에 돈거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성도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결국 빌려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격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끼리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속담에 “꾸어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태를 설명하는데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빌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빚’이란 우리가 돈을 갚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다른 부채와는 달리 변제 할 수 없는 무한한 부채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랑을 갚더라도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스승, 직장 동료뿐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서비스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정부의 모든 공직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롬13:7절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는데 사랑뿐 아니라 존경도 갚을 수 없습니다. 롬12: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존경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때든지 존경의 빚을 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의 빚을 갚기 위한 모든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바울은 누군가에게 지는 모든 빚은 그것이 조세이든 관세이든, 존경이든 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다른 행동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범주의 행동으로 구별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6: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가짐이요 태도이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8절의 요지는 우리가 권세에 복종할 때든지, 세금을 낼 때 든지, 제한속도를 지킬 때에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가 사랑의 행동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8절에 나오는 ‘피차 사랑하라’라는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매우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결국 8절 말씀은 단순히 절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빚에 대해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바꾸십시오. 사랑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사랑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입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십시오. 롬5:8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위에 자신의 삶이 세워진 성도라면 어떻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삶과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사랑의 개념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고전 13장입니다. 그중에 4-7절을 보면 “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더해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이며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기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면 우리의 태도가 변하고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되’, 그것이 내가 진 빚이야”라고 결심하면 그 결심이 사랑의 태도를 낳고 그 태도가 결국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
2. 사랑은 어떻게 빚이 되는가?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내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1:14절에서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빚진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서 빚진 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지속적으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빚을 지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롬1:15절을 보면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갚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지게 된 것은 롬1: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도직을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실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과 정죄를 씻어내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드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빚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 그 빚을 갚을 수도 없지만 갚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도 값없이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줄 뿐입니다.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요일4: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은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이웃사랑으로 갚아야 함
본문 9절에서 모든 계명이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애쓰는 것과 동일한 열망으로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척도로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이웃에게도 먹이고, 내가 목마르면 이웃에게도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의무가 아닙니다. 자기행복에 대한 열망이 동일하게 타인행복의 열망으로 연결될 때 우리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풍성한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기사랑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척도로 삼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2:37-40절에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계명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문 9절의 의미는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사랑을 너희처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하라 그러면 율법을 다 이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으로 갚게 됩니다.
4. 사랑은 왜 율법의 완성이 되는가?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도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 네 가지와 이웃에게 지켜야 할 법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십계명을 다 지킨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목적이 이웃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라면 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을 다 지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나열된 것들이 모두 십계명에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오경에는 더 많은 율법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몇가지 계명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십계명의 초점은 남을 다치게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율법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태도와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 계명들은 완성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시 거짓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직접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사랑을 요구했을까요? 바울은 갈3:17절에서 말하기를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지 430년 뒤에 생겼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할 때는 모세의 율법 특히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기 힘으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명의 길을 삼고자 애쓰지만 율법은 죄를 더할 뿐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율법을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롬8:3-4절에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영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대속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있던 그 자리에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두었습니다. 율법 대신에 위대한 구원자요 능력의 주요 영원한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롬7:4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직접 초점을 두는 대신에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며, 믿음으로 사랑을 가능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심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내 탓이야, 내가 사랑하지 못한 탓이야”라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사랑의 빚쟁이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계명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이웃사랑은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병들고 잔인한 사회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안 믿는 이웃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줍시다. 아직도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빚진 심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전설교 250622 사랑은 율법의 완성
본문: 롬13: 8-10
제목: 사랑은 율법의 완성
I. 서론
로마서 13장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1-7절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지 우리가 복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1)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하라
본문 8절에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실제적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돈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을 남에게 빌리면 안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집을 사는데 대출받는 것도 안될까요? 무언가 빌리는 순간부터 빚을 지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 아무것도 빌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7절 말씀이 8절의 배경이 됩니다. 8절은 절대로 빚을 지지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빚을 졌다면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세금이나 대출이나 빚을 진 것이 있다면 내야 할 돈을 제때에 갚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성도들 간에 돈거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성도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결국 빌려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격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끼리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속담에 “꾸어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태를 설명하는데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빌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빚’이란 우리가 돈을 갚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다른 부채와는 달리 변제 할 수 없는 무한한 부채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랑을 갚더라도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스승, 직장 동료뿐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서비스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정부의 모든 공직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롬13:7절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는데 사랑뿐 아니라 존경도 갚을 수 없습니다. 롬12: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존경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때든지 존경의 빚을 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의 빚을 갚기 위한 모든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바울은 누군가에게 지는 모든 빚은 그것이 조세이든 관세이든, 존경이든 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다른 행동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범주의 행동으로 구별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6: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가짐이요 태도이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8절의 요지는 우리가 권세에 복종할 때든지, 세금을 낼 때 든지, 제한속도를 지킬 때에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가 사랑의 행동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8절에 나오는 ‘피차 사랑하라’라는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매우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결국 8절 말씀은 단순히 절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빚에 대해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바꾸십시오. 사랑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사랑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입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십시오. 롬5:8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위에 자신의 삶이 세워진 성도라면 어떻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삶과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사랑의 개념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고전 13장입니다. 그중에 4-7절을 보면 “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더해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이며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기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면 우리의 태도가 변하고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되’, 그것이 내가 진 빚이야”라고 결심하면 그 결심이 사랑의 태도를 낳고 그 태도가 결국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
2. 사랑은 어떻게 빚이 되는가?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내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1:14절에서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빚진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서 빚진 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지속적으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빚을 지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롬1:15절을 보면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갚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지게 된 것은 롬1: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도직을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실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과 정죄를 씻어내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드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빚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 그 빚을 갚을 수도 없지만 갚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도 값없이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줄 뿐입니다.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요일4: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은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이웃사랑으로 갚아야 함
본문 9절에서 모든 계명이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애쓰는 것과 동일한 열망으로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척도로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이웃에게도 먹이고, 내가 목마르면 이웃에게도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의무가 아닙니다. 자기행복에 대한 열망이 동일하게 타인행복의 열망으로 연결될 때 우리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풍성한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기사랑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척도로 삼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2:37-40절에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계명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문 9절의 의미는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사랑을 너희처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하라 그러면 율법을 다 이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으로 갚게 됩니다.
4. 사랑은 왜 율법의 완성이 되는가?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도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 네 가지와 이웃에게 지켜야 할 법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십계명을 다 지킨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목적이 이웃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라면 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을 다 지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나열된 것들이 모두 십계명에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오경에는 더 많은 율법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몇가지 계명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십계명의 초점은 남을 다치게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율법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태도와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 계명들은 완성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시 거짓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직접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사랑을 요구했을까요? 바울은 갈3:17절에서 말하기를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지 430년 뒤에 생겼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할 때는 모세의 율법 특히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기 힘으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명의 길을 삼고자 애쓰지만 율법은 죄를 더할 뿐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율법을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롬8:3-4절에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영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대속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있던 그 자리에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두었습니다. 율법 대신에 위대한 구원자요 능력의 주요 영원한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롬7:4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직접 초점을 두는 대신에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며, 믿음으로 사랑을 가능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심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내 탓이야, 내가 사랑하지 못한 탓이야”라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사랑의 빚쟁이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계명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이웃사랑은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병들고 잔인한 사회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안 믿는 이웃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줍시다. 아직도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빚진 심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전설교 250622 사랑은 율법의 완성
본문: 롬13: 8-10
제목: 사랑은 율법의 완성
I. 서론
로마서 13장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1-7절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지 우리가 복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1)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하라
본문 8절에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실제적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돈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을 남에게 빌리면 안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집을 사는데 대출받는 것도 안될까요? 무언가 빌리는 순간부터 빚을 지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 아무것도 빌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7절 말씀이 8절의 배경이 됩니다. 8절은 절대로 빚을 지지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빚을 졌다면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세금이나 대출이나 빚을 진 것이 있다면 내야 할 돈을 제때에 갚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성도들 간에 돈거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성도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결국 빌려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격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끼리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속담에 “꾸어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태를 설명하는데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빌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빚’이란 우리가 돈을 갚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다른 부채와는 달리 변제 할 수 없는 무한한 부채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랑을 갚더라도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스승, 직장 동료뿐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서비스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정부의 모든 공직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롬13:7절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는데 사랑뿐 아니라 존경도 갚을 수 없습니다. 롬12: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존경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때든지 존경의 빚을 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의 빚을 갚기 위한 모든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바울은 누군가에게 지는 모든 빚은 그것이 조세이든 관세이든, 존경이든 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다른 행동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범주의 행동으로 구별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6: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가짐이요 태도이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8절의 요지는 우리가 권세에 복종할 때든지, 세금을 낼 때 든지, 제한속도를 지킬 때에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가 사랑의 행동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8절에 나오는 ‘피차 사랑하라’라는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매우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결국 8절 말씀은 단순히 절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빚에 대해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바꾸십시오. 사랑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사랑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입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십시오. 롬5:8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위에 자신의 삶이 세워진 성도라면 어떻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삶과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사랑의 개념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고전 13장입니다. 그중에 4-7절을 보면 “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더해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이며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기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면 우리의 태도가 변하고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되’, 그것이 내가 진 빚이야”라고 결심하면 그 결심이 사랑의 태도를 낳고 그 태도가 결국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
2. 사랑은 어떻게 빚이 되는가?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내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1:14절에서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빚진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서 빚진 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지속적으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빚을 지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롬1:15절을 보면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갚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지게 된 것은 롬1: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도직을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실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과 정죄를 씻어내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드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빚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 그 빚을 갚을 수도 없지만 갚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도 값없이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줄 뿐입니다.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요일4: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은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이웃사랑으로 갚아야 함
본문 9절에서 모든 계명이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애쓰는 것과 동일한 열망으로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척도로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이웃에게도 먹이고, 내가 목마르면 이웃에게도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의무가 아닙니다. 자기행복에 대한 열망이 동일하게 타인행복의 열망으로 연결될 때 우리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풍성한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기사랑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척도로 삼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2:37-40절에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계명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문 9절의 의미는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사랑을 너희처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하라 그러면 율법을 다 이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으로 갚게 됩니다.
4. 사랑은 왜 율법의 완성이 되는가?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도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 네 가지와 이웃에게 지켜야 할 법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십계명을 다 지킨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목적이 이웃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라면 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을 다 지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나열된 것들이 모두 십계명에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오경에는 더 많은 율법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몇가지 계명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십계명의 초점은 남을 다치게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율법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태도와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 계명들은 완성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시 거짓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직접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사랑을 요구했을까요? 바울은 갈3:17절에서 말하기를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지 430년 뒤에 생겼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할 때는 모세의 율법 특히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기 힘으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명의 길을 삼고자 애쓰지만 율법은 죄를 더할 뿐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율법을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롬8:3-4절에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영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대속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있던 그 자리에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두었습니다. 율법 대신에 위대한 구원자요 능력의 주요 영원한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롬7:4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직접 초점을 두는 대신에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며, 믿음으로 사랑을 가능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심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내 탓이야, 내가 사랑하지 못한 탓이야”라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사랑의 빚쟁이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계명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이웃사랑은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병들고 잔인한 사회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안 믿는 이웃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줍시다. 아직도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빚진 심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전설교 250622 사랑은 율법의 완성
본문: 롬13: 8-10
제목: 사랑은 율법의 완성
I. 서론
로마서 13장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1-7절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지 우리가 복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1)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하라
본문 8절에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실제적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돈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을 남에게 빌리면 안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집을 사는데 대출받는 것도 안될까요? 무언가 빌리는 순간부터 빚을 지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 아무것도 빌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7절 말씀이 8절의 배경이 됩니다. 8절은 절대로 빚을 지지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빚을 졌다면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세금이나 대출이나 빚을 진 것이 있다면 내야 할 돈을 제때에 갚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성도들 간에 돈거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성도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결국 빌려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격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끼리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속담에 “꾸어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태를 설명하는데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빌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빚’이란 우리가 돈을 갚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다른 부채와는 달리 변제 할 수 없는 무한한 부채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랑을 갚더라도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스승, 직장 동료뿐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서비스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정부의 모든 공직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롬13:7절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는데 사랑뿐 아니라 존경도 갚을 수 없습니다. 롬12: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존경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때든지 존경의 빚을 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의 빚을 갚기 위한 모든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바울은 누군가에게 지는 모든 빚은 그것이 조세이든 관세이든, 존경이든 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다른 행동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범주의 행동으로 구별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6: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가짐이요 태도이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8절의 요지는 우리가 권세에 복종할 때든지, 세금을 낼 때 든지, 제한속도를 지킬 때에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가 사랑의 행동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8절에 나오는 ‘피차 사랑하라’라는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매우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결국 8절 말씀은 단순히 절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빚에 대해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바꾸십시오. 사랑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사랑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입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십시오. 롬5:8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위에 자신의 삶이 세워진 성도라면 어떻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삶과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사랑의 개념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고전 13장입니다. 그중에 4-7절을 보면 “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더해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이며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기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면 우리의 태도가 변하고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되’, 그것이 내가 진 빚이야”라고 결심하면 그 결심이 사랑의 태도를 낳고 그 태도가 결국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
2. 사랑은 어떻게 빚이 되는가?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내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1:14절에서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빚진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서 빚진 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지속적으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빚을 지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롬1:15절을 보면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갚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지게 된 것은 롬1: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도직을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실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과 정죄를 씻어내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드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빚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 그 빚을 갚을 수도 없지만 갚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도 값없이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줄 뿐입니다.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요일4: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은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이웃사랑으로 갚아야 함
본문 9절에서 모든 계명이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애쓰는 것과 동일한 열망으로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척도로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이웃에게도 먹이고, 내가 목마르면 이웃에게도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의무가 아닙니다. 자기행복에 대한 열망이 동일하게 타인행복의 열망으로 연결될 때 우리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풍성한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기사랑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척도로 삼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2:37-40절에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계명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문 9절의 의미는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사랑을 너희처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하라 그러면 율법을 다 이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으로 갚게 됩니다.
4. 사랑은 왜 율법의 완성이 되는가?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도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 네 가지와 이웃에게 지켜야 할 법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십계명을 다 지킨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목적이 이웃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라면 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을 다 지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나열된 것들이 모두 십계명에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오경에는 더 많은 율법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몇가지 계명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십계명의 초점은 남을 다치게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율법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태도와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 계명들은 완성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시 거짓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직접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사랑을 요구했을까요? 바울은 갈3:17절에서 말하기를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지 430년 뒤에 생겼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할 때는 모세의 율법 특히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기 힘으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명의 길을 삼고자 애쓰지만 율법은 죄를 더할 뿐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율법을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롬8:3-4절에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영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대속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있던 그 자리에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두었습니다. 율법 대신에 위대한 구원자요 능력의 주요 영원한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롬7:4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직접 초점을 두는 대신에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며, 믿음으로 사랑을 가능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심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내 탓이야, 내가 사랑하지 못한 탓이야”라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사랑의 빚쟁이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계명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이웃사랑은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병들고 잔인한 사회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안 믿는 이웃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줍시다. 아직도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빚진 심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전설교 250622 사랑은 율법의 완성
본문: 롬13: 8-10
제목: 사랑은 율법의 완성
I. 서론
로마서 13장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1-7절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지 우리가 복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1)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하라
본문 8절에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실제적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돈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을 남에게 빌리면 안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집을 사는데 대출받는 것도 안될까요? 무언가 빌리는 순간부터 빚을 지는 것이므로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 아무것도 빌리지 말라는 뜻일까요? 7절 말씀이 8절의 배경이 됩니다. 8절은 절대로 빚을 지지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빚을 졌다면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세금이나 대출이나 빚을 진 것이 있다면 내야 할 돈을 제때에 갚으라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성도들 간에 돈거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성도 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결국 빌려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도 잃고 돈도 잃는 격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끼리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속담에 “꾸어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태를 설명하는데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은 빌리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빚’이란 우리가 돈을 갚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다른 부채와는 달리 변제 할 수 없는 무한한 부채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랑을 갚더라도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내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스승, 직장 동료뿐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서비스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정부의 모든 공직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크나큰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을수록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롬13:7절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는데 사랑뿐 아니라 존경도 갚을 수 없습니다. 롬12: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과 존경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때든지 존경의 빚을 지고 있다면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의 빚을 갚기 위한 모든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바울은 누군가에게 지는 모든 빚은 그것이 조세이든 관세이든, 존경이든 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다른 행동과는 상관없는 특별한 범주의 행동으로 구별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6:14절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가짐이요 태도이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여러 가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8절의 요지는 우리가 권세에 복종할 때든지, 세금을 낼 때 든지, 제한속도를 지킬 때에도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가 사랑의 행동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8절에 나오는 ‘피차 사랑하라’라는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매우 일반적인 명령입니다.
결국 8절 말씀은 단순히 절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갚아야 할 모든 빚에 대해 사랑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모든 행동을 사랑으로 바꾸십시오. 사랑 외에는 누구에게든 아무것도 빚지지 마십시오. 사랑은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입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하십시오. 롬5:8절에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위에 자신의 삶이 세워진 성도라면 어떻게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삶과 모든 일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사랑의 개념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고전 13장입니다. 그중에 4-7절을 보면 “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이웃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더해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이며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기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면 우리의 태도가 변하고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되’, 그것이 내가 진 빚이야”라고 결심하면 그 결심이 사랑의 태도를 낳고 그 태도가 결국 사랑의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
2. 사랑은 어떻게 빚이 되는가?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내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1:14절에서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빚진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울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서 빚진 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지속적으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빚을 지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롬1:15절을 보면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상에 갚아야 할 빚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갚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지게 된 것은 롬1: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도직을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실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과 정죄를 씻어내고 그분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실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드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빚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께 그 빚을 갚을 수도 없지만 갚으려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도 값없이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값없이 줄 뿐입니다.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요일4: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은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이웃사랑으로 갚아야 함
본문 9절에서 모든 계명이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애쓰는 것과 동일한 열망으로 이웃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척도로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이웃에게도 먹이고, 내가 목마르면 이웃에게도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의무가 아닙니다. 자기행복에 대한 열망이 동일하게 타인행복의 열망으로 연결될 때 우리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고 풍성한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자기사랑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척도로 삼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2:37-40절에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가지 계명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본문 9절의 의미는 “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사랑을 너희처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하라 그러면 율법을 다 이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으로 갚게 됩니다.
4. 사랑은 왜 율법의 완성이 되는가?
본문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녀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도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말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 네 가지와 이웃에게 지켜야 할 법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십계명을 다 지킨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목적이 이웃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라면 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이 모든 법을 다 지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나열된 것들이 모두 십계명에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오경에는 더 많은 율법이 있지만 바울은 여기서 몇가지 계명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십계명의 초점은 남을 다치게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율법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태도와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 계명들은 완성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당시 거짓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그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직접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사랑을 요구했을까요? 바울은 갈3:17절에서 말하기를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지 430년 뒤에 생겼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말할 때는 모세의 율법 특히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오히려 죄를 더하게 합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기 힘으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명의 길을 삼고자 애쓰지만 율법은 죄를 더할 뿐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결국 율법을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롬8:3-4절에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영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대속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을 완성하심으로써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있던 그 자리에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두었습니다. 율법 대신에 위대한 구원자요 능력의 주요 영원한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롬7:4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열매가 맺힙니까?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직접 초점을 두는 대신에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사랑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으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며, 믿음으로 사랑을 가능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심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내 탓이야, 내가 사랑하지 못한 탓이야”라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사랑의 빚쟁이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계명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됩시다. 사랑하는 사람이 승자입니다. 이웃사랑은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 무조건 무릎 꿇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병들고 잔인한 사회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은 우리 성도들입니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안 믿는 이웃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줍시다. 아직도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빚진 심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웃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결단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의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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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 롬14:1-6 | 2025-07-06 | 홍기칠 목사 |
68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 롬13:11-14 | 2025-06-29 | 홍기칠 목사 |
67 | 사랑은 율법의 완성 | 롬13:8-10 | 2025-06-22 | 홍기칠 목사 |
66 |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 롬13:1-7 | 2025-06-15 | 홍기칠 목사 |
65 |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 롬12:14-21 | 2025-06-08 | 홍기칠 목사 |
64 | 사랑으로 봉사하라 | 롬12:9-13 | 2025-06-01 | 홍기칠 목사 |
63 |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 | 롬12:3-8 | 2025-05-25 | 홍기칠 목사 |
62 | 구원받은 자의 삶 | 롬12:1-2 | 2025-05-18 | 홍기칠 목사 |
61 |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의 신비 | 롬11:25-36 | 2025-05-11 | 홍기칠 목사 |
60 | 이방인의 구원 | 롬11:17-24 | 2025-05-04 | 홍기칠 목사 |
59 | 이스라엘의 구원 | 롬11:1-6 | 2025-04-27 | 홍기칠 목사 |
58 |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 | 요20:1-18 | 2025-04-20 | 홍기칠 목사 |
57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 롬10:14-21 | 2025-04-13 | 홍기칠 목사 |
56 |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 | 롬10:1-13 | 2025-04-06 | 홍기칠 목사 |
55 |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을 통한 구원의 은혜 | 롬9:6-33 | 2025-03-30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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