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설교본문 | 롬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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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7-06 |
주일오전설교 250706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본문: 롬14:1-6
제목: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I. 서론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교회였기 때문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이 일어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롬 14, 15장에서 이 문제를 은혜롭게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는 유대교에 몸담고 있다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신자는 유대교의 배경이 전혀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 문화가 다른 두 집단의 사람들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상대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서로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야하는지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믿음이 연약한 자와 강한 자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성장합니다. 예수를 믿음 다음에도 엄격한 율법주의와 금욕주의 고수하던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로마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서 먹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종교적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로마교회 안에는 이 관습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고기를 먹는 것은 죄다, 경건하게 신앙생활 하려면 채식위주의 식사를 해야 한다”라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특정 음식을 먹느냐 여부를 가지고 구속당할 이유가 없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나 지켜라, 우리는 어떤 날에 메이지 않는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왜 안식일에 매여 생활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보고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율법에 메어 사는구먼“이라고 비난하고, 유대인 신자들은 ” 저것들이 저래도 경건한 생활을 한다고? 입만 살아서 돌아다는는 것들이..“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결국 서로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유대인 신자들을 ‘믿음이 약한 자’로 이방인 신자들을 ‘믿음이 강한 자’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 약한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확실히 믿지만 생활문제에 있어서 특히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 자유롭게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문제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생활문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문제는 죄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단순히 믿음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다투는 것은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를 다루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 두가지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이나 절기문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구약에서 그림자처럼 잠깐 허락되었던 규례이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새로운 길이 열린 지금에는 필요없는 낡은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림자 같은 구약의 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 신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약한 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안에서 음식이나 절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방인 신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의 음식규례와 절기를 지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믿음과 행위의 차이를 선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않고 롬14:21절에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은혜로 풀지 못하고 자기 노력으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므로 믿음이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옛날의 규례, 법규, 전통, 습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비록 로마인들이 고기를 잡을 때 우상에게 먼저 바치고 난 다음 그 고기를 잡으니 유대인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는 우상의 제물이므로 먹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모든 음식은 다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신앙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도 없고,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고 지옥갈까 불안해 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롬3:28절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과 갈5:1절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말라“는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여부와는 관계없이 단지 부수적인 문제로 교회 성도들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비본질적인 문제들
현재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갈등이 일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 그리고 자신이 어느 교파, 어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부수적인 문제, 비본질적인 문제를 마치 성경의 진리인 것처럼 들고 나와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주와 흡연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교인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교인을 보고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거나 아예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지옥간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와보니 음주와 흡연 문제가 심각해서 신앙생활에 지장이 되었기 때문에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 그것을 금한 것이 유래가 되어 지금까지 교회의 전통이 되어 온 것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온 초신자의 경우 술, 담배를 금방 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초신자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니 흡연실을 따로 마련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혹은 어쩌다 남편이 주말에 술 냄새 피우며 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아이고 당신 또 죄를 지었군요, 술 냄새나니 내일 주일에는 차라리 교회 나오지 마세요“라고 몰아세우는 아내가 있다면 그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싶겠습니까?
혹은 주일성수에 관한 문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제가 어릴 때는 주일날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일날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먹으며 돈을 쓰는 교인들은 신앙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권사님은 주일날 드릴 헌금을 토요일날 미리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하게 해서 바쳐야 된다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시험기간이라도 주일날에는 시험공부해서는 안된다고 해서, 저는 주일 밤 12시가 지나서 그때부터 시험공부한 적도 있었습니다.
주일 성수라는 말은 한국교회가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원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세칙을 만들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 주일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밤에 근무하고 낮에 잠을 자야하는 직업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일요일에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일요일은 미국에서는 토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적 자유는 어떤 날이 우상이 되고, 그날에 매어 종살이를 했던 자리에서 해방된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특별히 기념하여 모이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는 것은 기독교의 값진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날을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어느 날을 지켜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면 무방합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그 주일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법규를 만들어서 그것을 잘 실천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하고, 그것을 범하면 주일을 어겼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자칫하면 그런 형식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성수의 본질은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하여 그날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삼으며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일 성수에 관한 한 자기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에서 기타나 드럼을 치면 되느냐의 여부,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 새벽기도 등을 하느냐의 여부, 중직자 선출하는 방법, 중직자로 선출된 사람들의 헌금 문제 등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관해 올바른 성경적 근거나 해석이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3. 형제를 포용하라
믿음이란 그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바뀐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숙한 믿음이든 연약한 믿음이든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이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를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 그 평가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는 그 판단은 절대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늘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컨대 한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가 들어있는 옥합을 예수님께 들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드렸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이든지 이 여자가 행한 것도 전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믿음을 지극히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금화를 넣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자기의 높은 믿음의 표시인 것처럼 당당해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어느 과부는 한 고드란트를 남이 볼까 부끄러워하면서 몰래 넣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나 보다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애 하겠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받아들이려면 나부터 열려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지 말고 시비거리로 삼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지닌 사람은 모든 형식적인 것을 떠나 늘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 앞에 바로 서려는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미숙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형식에 얽매이는 사람입니다. 형식에 메어 있기 때문에 아직 본질을 접해보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이나 행동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단계가 있기 마련이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성숙한 사람도 처음에는 미숙한 상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본문 2절에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부터 3,500년 전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때 모세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1,500여년이 지난 사도바울 시대에도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로마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기 때문에 정육점 주인들이 짐승을 잡으면 그 고기를 먼저 우상에게 바치고 나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유대인 신자들이 볼 때 그 고기는 우상의 제물인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인 고기를 먹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고기를 절대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처럼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이라는 형식에 메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15:16-18절에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음식은 속된 것이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음식은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먹으면 다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전10: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먹든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못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고기 대신 채소만 먹겠다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본문 3절에 ”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제물이라고 고기를 먹지 않는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를 누가 그의 주인을 대신하여 감히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자라도 그를 업신여기는 것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믿음으로 먹는 사람이나 믿음으로 먹지 않는 사람이나 서로 업신여기지 말고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강한자나 연약한 자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하나님 자녀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먹지 않은 것이고, 혹은 먹은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고기와 포도주를 피한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믿음이 없다 하지 않고 믿음이 연약하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본문 4절에 보면 ”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며 그가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인이 서 있든지 넘어져 있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그 주인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인이 주인에게 머리만 숙여 인사 하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든 그것은 철저하게 그 주인에게 달려 있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비록 미숙하다 해도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바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성숙하게 바로 세울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는 ”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같은 절기가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 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다르게 보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365일이 다 중요하기 때문에 1년 365일이 모두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지 서로 다른 생각을 비판하려 하지 말고 각각 소신대로 주님과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5절에서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는 말씀은 자신이 확신한대로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각 절기를 특별한 날로 믿는 사람은 그날의 의미를 새기며 더 뜻깊게 보내야 합니다. 즉 부활절이라면 부활절 예배 참석뿐 아니라 전도현장에 나가 부활의 소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365일이 모두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365일을 부활절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한걸은 더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6절에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내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든지 그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시작하면 우리는 서로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되어 남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거나, 스스로 자만하거나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믿음을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그들을 포용하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가 아무리 잘못하는 것이 눈에 보여도 내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 형제에게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포용해야 합니다. 서로 좋은 점을 배우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이해해주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III.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형제를 비난하지 말고 포용하고 받아줍시다. 그리고 그 형제에게 주인 노릇하지 맙시다. 그에게 무언가 좀 못마땅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죄와 관계없는 문제라면 그 형제의 약한 믿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됩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내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남편 혹은 아내 혹은 주위 성도들의 믿음을 업신여기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형제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세워주는 믿음의 생활을 다시 시작합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이 되어 우리 각각 바로 서게 되고,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로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서로 용납하고 포용함으로 주님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끝>
주일오전설교 250706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본문: 롬14:1-6
제목: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I. 서론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교회였기 때문에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이 일어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롬 14, 15장에서 이 문제를 은혜롭게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는 유대교에 몸담고 있다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신자는 유대교의 배경이 전혀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 문화가 다른 두 집단의 사람들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상대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서로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야하는지에 대해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믿음이 연약한 자와 강한 자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성장합니다. 예수를 믿음 다음에도 엄격한 율법주의와 금욕주의 고수하던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로마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서 먹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종교적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로마교회 안에는 이 관습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고기를 먹는 것은 죄다, 경건하게 신앙생활 하려면 채식위주의 식사를 해야 한다”라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특정 음식을 먹느냐 여부를 가지고 구속당할 이유가 없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나 지켜라, 우리는 어떤 날에 메이지 않는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왜 안식일에 매여 생활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보고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율법에 메어 사는구먼“이라고 비난하고, 유대인 신자들은 ” 저것들이 저래도 경건한 생활을 한다고? 입만 살아서 돌아다는는 것들이..“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결국 서로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유대인 신자들을 ‘믿음이 약한 자’로 이방인 신자들을 ‘믿음이 강한 자’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 약한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확실히 믿지만 생활문제에 있어서 특히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 자유롭게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문제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생활문제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문제는 죄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단순히 믿음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다투는 것은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를 다루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 두가지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이나 절기문제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구약에서 그림자처럼 잠깐 허락되었던 규례이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새로운 길이 열린 지금에는 필요없는 낡은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림자 같은 구약의 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 신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이 약한 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안에서 음식이나 절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방인 신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의 음식규례와 절기를 지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믿음과 행위의 차이를 선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그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지않고 롬14:21절에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은혜로 풀지 못하고 자기 노력으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므로 믿음이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옛날의 규례, 법규, 전통, 습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비록 로마인들이 고기를 잡을 때 우상에게 먼저 바치고 난 다음 그 고기를 잡으니 유대인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는 우상의 제물이므로 먹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모든 음식은 다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신앙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도 없고,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고 지옥갈까 불안해 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롬3:28절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과 갈5:1절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말라“는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여부와는 관계없이 단지 부수적인 문제로 교회 성도들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비본질적인 문제들
현재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로 갈등이 일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 그리고 자신이 어느 교파, 어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부수적인 문제, 비본질적인 문제를 마치 성경의 진리인 것처럼 들고 나와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주와 흡연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교인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교인을 보고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거나 아예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지옥간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와보니 음주와 흡연 문제가 심각해서 신앙생활에 지장이 되었기 때문에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 그것을 금한 것이 유래가 되어 지금까지 교회의 전통이 되어 온 것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온 초신자의 경우 술, 담배를 금방 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초신자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니 흡연실을 따로 마련해야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혹은 어쩌다 남편이 주말에 술 냄새 피우며 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아이고 당신 또 죄를 지었군요, 술 냄새나니 내일 주일에는 차라리 교회 나오지 마세요“라고 몰아세우는 아내가 있다면 그 남편이 교회에 나오고 싶겠습니까?
혹은 주일성수에 관한 문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제가 어릴 때는 주일날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일날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먹으며 돈을 쓰는 교인들은 신앙이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권사님은 주일날 드릴 헌금을 토요일날 미리 다리미로 다려서 빳빳하게 해서 바쳐야 된다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시험기간이라도 주일날에는 시험공부해서는 안된다고 해서, 저는 주일 밤 12시가 지나서 그때부터 시험공부한 적도 있었습니다.
주일 성수라는 말은 한국교회가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원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세칙을 만들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 주일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밤에 근무하고 낮에 잠을 자야하는 직업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일요일에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일요일은 미국에서는 토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적 자유는 어떤 날이 우상이 되고, 그날에 매어 종살이를 했던 자리에서 해방된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특별히 기념하여 모이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는 것은 기독교의 값진 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날을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어느 날을 지켜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면 무방합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그 주일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법규를 만들어서 그것을 잘 실천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하고, 그것을 범하면 주일을 어겼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자칫하면 그런 형식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성수의 본질은 일주일에 한 날을 정하여 그날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삼으며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일 성수에 관한 한 자기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에서 기타나 드럼을 치면 되느냐의 여부, 수요예배, 금요철야기도, 새벽기도 등을 하느냐의 여부, 중직자 선출하는 방법, 중직자로 선출된 사람들의 헌금 문제 등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관해 올바른 성경적 근거나 해석이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3. 형제를 포용하라
믿음이란 그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바뀐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숙한 믿음이든 연약한 믿음이든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이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를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 그 평가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는 그 판단은 절대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늘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컨대 한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가 들어있는 옥합을 예수님께 들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드렸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이든지 이 여자가 행한 것도 전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믿음을 지극히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금화를 넣는 사람은 그것이 마치 자기의 높은 믿음의 표시인 것처럼 당당해 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어느 과부는 한 고드란트를 남이 볼까 부끄러워하면서 몰래 넣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나 보다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애 하겠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받아들이려면 나부터 열려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지 말고 시비거리로 삼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지닌 사람은 모든 형식적인 것을 떠나 늘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 앞에 바로 서려는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미숙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형식에 얽매이는 사람입니다. 형식에 메어 있기 때문에 아직 본질을 접해보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이나 행동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단계가 있기 마련이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성숙한 사람도 처음에는 미숙한 상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본문 2절에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부터 3,500년 전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때 모세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1,500여년이 지난 사도바울 시대에도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로마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기 때문에 정육점 주인들이 짐승을 잡으면 그 고기를 먼저 우상에게 바치고 나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유대인 신자들이 볼 때 그 고기는 우상의 제물인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인 고기를 먹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고기를 절대 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처럼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이라는 형식에 메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15:16-18절에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음식은 속된 것이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음식은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먹으면 다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전10: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먹든지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못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고기 대신 채소만 먹겠다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본문 3절에 ”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제물이라고 고기를 먹지 않는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은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를 누가 그의 주인을 대신하여 감히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자라도 그를 업신여기는 것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믿음으로 먹는 사람이나 믿음으로 먹지 않는 사람이나 서로 업신여기지 말고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강한자나 연약한 자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하나님 자녀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먹지 않은 것이고, 혹은 먹은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고기와 포도주를 피한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믿음이 없다 하지 않고 믿음이 연약하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본문 4절에 보면 ”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며 그가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인이 서 있든지 넘어져 있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그 주인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인이 주인에게 머리만 숙여 인사 하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든 그것은 철저하게 그 주인에게 달려 있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비록 미숙하다 해도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바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성숙하게 바로 세울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는 ”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같은 절기가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 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다르게 보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365일이 다 중요하기 때문에 1년 365일이 모두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지 서로 다른 생각을 비판하려 하지 말고 각각 소신대로 주님과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5절에서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는 말씀은 자신이 확신한대로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각 절기를 특별한 날로 믿는 사람은 그날의 의미를 새기며 더 뜻깊게 보내야 합니다. 즉 부활절이라면 부활절 예배 참석뿐 아니라 전도현장에 나가 부활의 소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365일이 모두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365일을 부활절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한걸은 더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6절에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내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든지 그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시작하면 우리는 서로 상대적으로 비교하게 되어 남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거나, 스스로 자만하거나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믿음을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그들을 포용하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가 아무리 잘못하는 것이 눈에 보여도 내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 형제에게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포용해야 합니다. 서로 좋은 점을 배우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이해해주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III.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형제를 비난하지 말고 포용하고 받아줍시다. 그리고 그 형제에게 주인 노릇하지 맙시다. 그에게 무언가 좀 못마땅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죄와 관계없는 문제라면 그 형제의 약한 믿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됩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내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남편 혹은 아내 혹은 주위 성도들의 믿음을 업신여기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형제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세워주는 믿음의 생활을 다시 시작합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믿음이 되어 우리 각각 바로 서게 되고,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로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서로 용납하고 포용함으로 주님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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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 롬13:11-14 | 2025-06-29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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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 롬13:1-7 | 2025-06-15 | 홍기칠 목사 |
65 |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 롬12:14-21 | 2025-06-08 | 홍기칠 목사 |
64 | 사랑으로 봉사하라 | 롬12:9-13 | 2025-06-01 | 홍기칠 목사 |
63 |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 | 롬12:3-8 | 2025-05-25 | 홍기칠 목사 |
62 | 구원받은 자의 삶 | 롬12:1-2 | 2025-05-18 | 홍기칠 목사 |
61 |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의 신비 | 롬11:25-36 | 2025-05-11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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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을 통한 구원의 은혜 | 롬9:6-33 | 2025-03-30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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