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설교본문 | 행4: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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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10-05 |
주일오전설교 251005 공회 앞에서 증언한 베드로
본문:행4:1-22
제목:공회 앞에서 증언한 베드로
I. 서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신체장애인을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우니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능력있는 설교와 기적을 통해 성도들의 수가 5천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제자들이 일어나 더욱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들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70인 공회원들 앞에서 그 장애인이 치유된 것이 구약예언의 성취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임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증거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공회 앞에서 복음증거한 베드로
행3장에서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된 것을 설교할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들었습니다. 본문1-4절에 보니 당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심문하려 했으나 저물어 하룻밤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면서 첫 번째로 핍박을 당하는 것이 본문에서 처음 나옵니다.
사두개인처럼 오늘날에도 부활이나 내세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이 시대에 예수를 믿고 축복받고 잘 살고 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퍼져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된 부활의 진리를 전할 때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시대에 십자가의 길을 가며 내세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하면 싫어하고 비판합니다.
본문 5-7절을 보면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들이 다 참여해 공의회를 개최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했습니다. 관리들이란 성전경비대원으로 레위인 중에서 임명되는데 그 대장은 대제사장 다음으로 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주로 율법교사로서 유대율법과 전통을 가장 상세한 부분까지 순종하던 엄격한 종교적 유대인으로 회당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고 죽은자의 부활을 믿었으나, 예수님이 그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죄인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부인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유한 상류층으로 모세오경 외의 성경의 권위는 부정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영혼,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혼불멸과 죽은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전장사에서 이윤을 챙기고 바리새인과 더불어 유대 공회이 주요 두 당파 중 하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이었는데 앞의 제사장과 성전경비대장은 모두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 중 한명의 대제사장이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역할을 했습니다. 공회원은 대제사장까지 포함하면 71명이 됩니다. 그들은 오늘날 국회의원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율법의 전문해석자로 전통을 강조하고 율법을 재해석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모든 전통을 순종하지 않았음으로 그가 메시아임을 부인했습니다. 서기관들 중 대부분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이 유대교의 중추적인 세당파를 형성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 역시 고위층의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본문 6절에 여기에 대제사장 안나스는 이미 은퇴를 했음에도 그 사위인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세워 놓고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몹시 귀찮게 여기고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으나 밤에 재판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남으로 이틑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그 다음날 재판하기 위하여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대의회인 산헤드린 공회의 70명, 대제사장1명을 포함하면 71명을 전부 소집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렸던 바로 그 공회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권 외에 종교적 문제와 민사 등의 주요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대제사장 안나스는 은퇴 후에도 그의 사위 가야바를 통해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할 때도 이 두 사람이 심문했습니다. 가야바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으로서 가야바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에 오른 인물로 추정되고, 알렉산더는 당대 최고 갑부중 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그 외에 대제사장 가문 사람들도 투표권으로 도와주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이튿날 공의회에서 재판을 했는데 그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첫째, 공식교육이나 랍비 임명식을 받은 적이 없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허락없이 가르치는 행위를 한 것은 월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적인 권세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지면 정통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통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대단한 학위를 받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할 때도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서 활동했던 것처럼 종교활동은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기득권 세력이 새로 일어난 부흥을 주도하는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둘째, 죽은 사람의 부활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더구나 자신들이 죽인 예수를 부활의 실례로 들었으므로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마도 백성들에게 미치는 사도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시기심이 발동하거나 자기들이 눈치보는 로마당국자들의 의혹을 초래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날 예수 믿는 남자들의 수가 5천명이나 되었고, 베드로의 1차 설교때 믿은 3천명 까지 더하면 8,000명인데 그 부인과 자녀까지 합하면 약 24,000명이 되는데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8만여명이라고 추정할 때 약 20% 이상이 예수를 믿은 것이 되니 엄청난 인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유대지도자들에게는 실제적인 위협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무슨 권세로’ 라는 말은 마술적 주문을 통해 어떤 악령의 힘을 이용하여 이적을 행했다는 식으로 유도하려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마술을 행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누구 이름으로’ 라는 말은 만약 ‘예수 이름으로’ 라고 말하면 로마에 반역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자를 따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고 하면 신성모독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을 감옥에 보내려고 작정을 하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여 담대하게 본문 8-12절의 내용으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사로 잡아주시면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 주시고 손발로 봉사할 때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충만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행4:30-31절에 보면 “ 손을 내밀어 별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충만 받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주십니다. 이 성령충만을 받아야 복음을 기탄없이 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성령충만을 받아 70인 공회 앞에서 이처럼 담대히 복음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답변한 것은 네가지입니다.
첫째, 치유의 기적은 걷지 못하는 자에게 유익을 주고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착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체장애인이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착한 일,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람은 치유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가능했고, 그의 현재 모습이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원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유대지도자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내가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지난 날의 죄인된 삶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알아야만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여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을 향해 너희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리스도란 그의 신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가 이 장애인의 영육을 치유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두달 전만 해도 대제사장은 고사하고 어린 하녀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겁쟁이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이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 118:22절을 인용한 것이고, 막12: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모퉁이 돌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을 이야기 합니다. 건축자들은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집을 맡은 건축자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여 버렸는데 그 버린 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퉁이 되어 영적 왕국을 건설하는데 머릿돌,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그들의 손으로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의 모퉁이 돌이 된다는 것이 이미 시편에 예언되어 있었다고 베드로는 담대해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유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석가도 마호멧도 공자도 다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그도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외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새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 기독교가 얼마나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교만한가를 말하면서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단순명료한 구원의 길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 공회원들의 법적 결정과 베드로의 반론
이러한 베드로의 답변에 대해 13-18절에서 산헤드린 공의회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반론에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세가지입니다.
첫째, 사도들은 용기있게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바에 대해 매우 논리정연하고 분명하게 증언했기 때문에 유대 법정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정규 랍비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능력이 그 전에 같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러한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에서 놀랐습니다.
둘째, 병이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므로 더 이상 그 증거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는 로마정부의 간섭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정부는 백성들의 민심에 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사도들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회의 최종결론은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위협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능력 있는 설교와 기적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심과 부활이 계속 알려질 경우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 겉잡을 수 없는 비난과 분노가 쏟아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공의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백성들이 치유되는 일보다는 자신들의 교권과 안전유지를 위해 백성을 더 무서워하는 위선적이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판결은 근거가 없고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9-20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예수님과 3년동안 함께 있었으며 그분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하였고 성령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 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담대히 선언한 것입니다. 공회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단호히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21-22절에서 그 공의회는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와 분명한 말씀선포에 놀라고 그들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이 두려워서 1차 경고가 무시되자 다시 한번 위협하고 놓아주게 됩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특히 유대민족은 율법과 신앙을 중심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백성의 의미와 가치가 남달리 중요했습니다. 그 공의회가 백성을 두려워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블신앙적이고 독선적인 공포였습니다. 22절에는 표적으로 병나은 사람의 나이가 40세였다고 했습니다. 40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이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갈 때 사도들은 기회있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증인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계시고, 그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우선순위요 중요한 분이라면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일상대화가 될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의 삶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가 과연 우리들의 주된 화제가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눅6:45절에서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그들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삶의 의미요 가치임을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날마다 자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세계 선교현장과 우리 주변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오해받고, 거절당하고, 조롱당하며, 배척당하며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기꺼이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위험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어떠한 것도 낭비가 아니요, 상급은 더 확실하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받으면 평범한 성도들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하면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베드로와 요한사도처럼 성령충만 받아 담대히 복음증거하여 대구교대와 남구주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전설교 251005 공회 앞에서 증언한 베드로
본문:행4:1-22
제목:공회 앞에서 증언한 베드로
I. 서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신체장애인을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우니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능력있는 설교와 기적을 통해 성도들의 수가 5천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제자들이 일어나 더욱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들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70인 공회원들 앞에서 그 장애인이 치유된 것이 구약예언의 성취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임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증거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공회 앞에서 복음증거한 베드로
행3장에서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된 것을 설교할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들었습니다. 본문1-4절에 보니 당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심문하려 했으나 저물어 하룻밤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오순절 이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면서 첫 번째로 핍박을 당하는 것이 본문에서 처음 나옵니다.
사두개인처럼 오늘날에도 부활이나 내세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이 시대에 예수를 믿고 축복받고 잘 살고 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퍼져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된 부활의 진리를 전할 때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시대에 십자가의 길을 가며 내세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하면 싫어하고 비판합니다.
본문 5-7절을 보면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들이 다 참여해 공의회를 개최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했습니다. 관리들이란 성전경비대원으로 레위인 중에서 임명되는데 그 대장은 대제사장 다음으로 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입니다. 바리새인은 주로 율법교사로서 유대율법과 전통을 가장 상세한 부분까지 순종하던 엄격한 종교적 유대인으로 회당에서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고 죽은자의 부활을 믿었으나, 예수님이 그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죄인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부인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유한 상류층으로 모세오경 외의 성경의 권위는 부정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영혼, 천사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혼불멸과 죽은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전장사에서 이윤을 챙기고 바리새인과 더불어 유대 공회이 주요 두 당파 중 하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이었는데 앞의 제사장과 성전경비대장은 모두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 중 한명의 대제사장이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역할을 했습니다. 공회원은 대제사장까지 포함하면 71명이 됩니다. 그들은 오늘날 국회의원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율법의 전문해석자로 전통을 강조하고 율법을 재해석하는 예수님의 권위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모든 전통을 순종하지 않았음으로 그가 메시아임을 부인했습니다. 서기관들 중 대부분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이 유대교의 중추적인 세당파를 형성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 역시 고위층의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본문 6절에 여기에 대제사장 안나스는 이미 은퇴를 했음에도 그 사위인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세워 놓고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몹시 귀찮게 여기고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으나 밤에 재판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남으로 이틑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그 다음날 재판하기 위하여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대의회인 산헤드린 공회의 70명, 대제사장1명을 포함하면 71명을 전부 소집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렸던 바로 그 공회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권 외에 종교적 문제와 민사 등의 주요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대제사장 안나스는 은퇴 후에도 그의 사위 가야바를 통해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할 때도 이 두 사람이 심문했습니다. 가야바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으로서 가야바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에 오른 인물로 추정되고, 알렉산더는 당대 최고 갑부중 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그 외에 대제사장 가문 사람들도 투표권으로 도와주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이튿날 공의회에서 재판을 했는데 그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첫째, 공식교육이나 랍비 임명식을 받은 적이 없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허락없이 가르치는 행위를 한 것은 월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적인 권세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지면 정통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통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대단한 학위를 받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할 때도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서 활동했던 것처럼 종교활동은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기득권 세력이 새로 일어난 부흥을 주도하는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둘째, 죽은 사람의 부활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더구나 자신들이 죽인 예수를 부활의 실례로 들었으므로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마도 백성들에게 미치는 사도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시기심이 발동하거나 자기들이 눈치보는 로마당국자들의 의혹을 초래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날 예수 믿는 남자들의 수가 5천명이나 되었고, 베드로의 1차 설교때 믿은 3천명 까지 더하면 8,000명인데 그 부인과 자녀까지 합하면 약 24,000명이 되는데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8만여명이라고 추정할 때 약 20% 이상이 예수를 믿은 것이 되니 엄청난 인구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유대지도자들에게는 실제적인 위협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무슨 권세로’ 라는 말은 마술적 주문을 통해 어떤 악령의 힘을 이용하여 이적을 행했다는 식으로 유도하려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마술을 행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누구 이름으로’ 라는 말은 만약 ‘예수 이름으로’ 라고 말하면 로마에 반역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자를 따르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고 하면 신성모독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을 감옥에 보내려고 작정을 하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여 담대하게 본문 8-12절의 내용으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사로 잡아주시면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 주시고 손발로 봉사할 때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사도들은 성령충만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행4:30-31절에 보면 “ 손을 내밀어 별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충만 받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주십니다. 이 성령충만을 받아야 복음을 기탄없이 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성령충만을 받아 70인 공회 앞에서 이처럼 담대히 복음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답변한 것은 네가지입니다.
첫째, 치유의 기적은 걷지 못하는 자에게 유익을 주고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착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체장애인이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착한 일,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람은 치유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가능했고, 그의 현재 모습이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원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유대지도자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내가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지난 날의 죄인된 삶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알아야만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격하여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을 향해 너희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리스도란 그의 신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가 이 장애인의 영육을 치유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두달 전만 해도 대제사장은 고사하고 어린 하녀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했던 겁쟁이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이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시편 118:22절을 인용한 것이고, 막12: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모퉁이 돌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머릿돌을 이야기 합니다. 건축자들은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집을 맡은 건축자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여 버렸는데 그 버린 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퉁이 되어 영적 왕국을 건설하는데 머릿돌,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그들의 손으로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집의 모퉁이 돌이 된다는 것이 이미 시편에 예언되어 있었다고 베드로는 담대해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유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석가도 마호멧도 공자도 다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그도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외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새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해 기독교가 얼마나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교만한가를 말하면서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단순명료한 구원의 길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 공회원들의 법적 결정과 베드로의 반론
이러한 베드로의 답변에 대해 13-18절에서 산헤드린 공의회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반론에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세가지입니다.
첫째, 사도들은 용기있게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바에 대해 매우 논리정연하고 분명하게 증언했기 때문에 유대 법정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정규 랍비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능력이 그 전에 같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러한 능력이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에서 놀랐습니다.
둘째, 병이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살아있는 증거가 되므로 더 이상 그 증거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는 로마정부의 간섭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정부는 백성들의 민심에 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사도들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회의 최종결론은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위협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능력 있는 설교와 기적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심과 부활이 계속 알려질 경우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 겉잡을 수 없는 비난과 분노가 쏟아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공의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백성들이 치유되는 일보다는 자신들의 교권과 안전유지를 위해 백성을 더 무서워하는 위선적이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판결은 근거가 없고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19-20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의 결정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들은 실제로 예수님과 3년동안 함께 있었으며 그분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하였고 성령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 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담대히 선언한 것입니다. 공회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단호히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자 21-22절에서 그 공의회는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와 분명한 말씀선포에 놀라고 그들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이 두려워서 1차 경고가 무시되자 다시 한번 위협하고 놓아주게 됩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백성들 때문입니다. 특히 유대민족은 율법과 신앙을 중심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백성의 의미와 가치가 남달리 중요했습니다. 그 공의회가 백성을 두려워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블신앙적이고 독선적인 공포였습니다. 22절에는 표적으로 병나은 사람의 나이가 40세였다고 했습니다. 40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이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갈 때 사도들은 기회있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증인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계시고, 그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우선순위요 중요한 분이라면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일상대화가 될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의 삶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가 과연 우리들의 주된 화제가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눅6:45절에서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과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그들의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삶의 의미요 가치임을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날마다 자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세계 선교현장과 우리 주변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오해받고, 거절당하고, 조롱당하며, 배척당하며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기꺼이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위험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어떠한 것도 낭비가 아니요, 상급은 더 확실하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받으면 평범한 성도들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하면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베드로와 요한사도처럼 성령충만 받아 담대히 복음증거하여 대구교대와 남구주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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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공회 앞에서 증언한 베드로 | 행4:1-22 | 2025-10-05 | 홍기칠 목사 |
81 | 일어나 걸으라 | 행3:1-26 | 2025-09-28 | 홍기칠 목사 |
80 | 오순절에 시작된 초대교회 | 행2:37-47 | 2025-09-21 | 홍기칠 목사 |
79 | 오순절에 임한 성령 | 행2:1-36 | 2025-09-14 | 홍기칠 목사 |
78 | 내 증인이 되리라 | 행1:6-26 | 2025-09-07 | 홍기칠 목사 |
77 |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행1:1-5 | 2025-08-31 | 홍기칠 목사 |
76 | 하나님께 영광을 | 롬16:17-27 | 2025-08-24 | 홍기칠 목사 |
75 | 소중한 평신도 동역자들 | 롬16:1-16 | 2025-08-17 | 홍기칠 목사 |
74 | 바울의 최종 헌신과 선교비전 | 롬15:22-33 | 2025-08-10 | 홍기칠 목사 |
73 | 바울의 선교 | 롬15:14-21 | 2025-08-03 | 홍기칠 목사 |
72 | 모든 열방이 주님께 영광을 | 롬15:1-13 | 2025-07-27 | 홍기칠 목사 |
71 | 믿음을 따라 행하라 | 롬14:13-23 | 2025-07-20 | 홍기칠 목사 |
70 | 주를 위하여 행하라 | 롬14:5-12 | 2025-07-13 | 홍기칠 목사 |
69 |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 롬14:1-6 | 2025-07-06 | 홍기칠 목사 |
68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 롬13:11-14 | 2025-06-29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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