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 설교본문 | 행9:1-31 |
|---|---|
| 설교자 | 홍기칠 목사 |
| 설교일 | 2025-11-23 |
주일오전설교 251123 사울의 회심
본문: 행9:1-31
제목: 사울의 회심
I. 서론
스데반이 유대 율법지도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습니다. 그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 순교장면을 보면서 그 죽음이 하나님을 모독하다 죽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떠나게 됩니다.
오늘 행9장은 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인 다소 사람 사울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율법신학과 언어와 문화에 정통한 자였습니다. 그는 진짜 히브리인이었고, 다소 태생으로 헬라문화에 정통하였고, 로마제국의 시민이었으며, 또한 세상 직업인 천막짜는 기술을 익혀 선교여행이나 사역을 할 때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세계선교하기에 가장 적합하게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하나님께 구해서 얻은 아들’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회심한 이후 그 이름을 바울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런 은사가 많이 갖춘 그를 사용하시기 전에 그는 먼저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사울이 핍박을 피해 다메섹으로 간 성도들을 체포하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환상으로 만난 사건과 그 이후의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울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회심 이후에 어떻게 복음 전도자가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 사울이 회심하기 전의 상태(1-2)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증인들이 벗은 옷을 맡아 주었고, 그가 돌아 맞아 죽은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러한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다메섹으로 흩어지자 그들을 다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그 당시 로마정부로부터 사법권 일부를 위임받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으로 가져갈 공문을 받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하다’는 것은 야생동물이 먹이를 찾기 위해 헐떡거리며 코를 씨끈거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행8:3절에도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서도 교회를 잔멸 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잔멸’한다는 단어는 포도원을 황폐하게 하는 야생 멧돼지의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서 그 도를 따르는 자 즉,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고자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증오로 가득 찼으며 그런 자신의 행위와 열심은 오로지 하나님을 더 열심히 섬기는 것이라 편견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2.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3-9)
주요 상업도시였던 다메섹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240 km 정도 떨어진 수리아의 로마 지방이었습니다. 다메섹에는 로마 전역에 있는 다른 도시들과 연결되는 여러 통상도로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나 멀리 떨어진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한 이유는 달아난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진압함으로써 기독교가 다른 주요도시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문3-6절을 보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으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울과 그의 호위병들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막 240km를 일주일 정도 걸려서 도착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들이 오정쯤 되어 사막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오아시스인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강한 빛이 그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그는 너무나 압도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에 그는 땅에 쓰러졌고 그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은 곧 바로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했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을 사울이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시고 이제는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출현이었습니다. 그가 본 빛은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으며, 그가 들은 음성은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사도직의 필요조건이었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바나바의 증언이 그가 예수를 눈으로 목격하였음을 확증합니다.
본문 8,9절을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이 갑작스럽고 엄청난 일을 경험하자 그 충격 때문에 사흘동안이나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그가 한 일과 지금 경험한 이 놀라운 사건을 생각해보면서 엄청난 혼란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그 제자들과 초대교인들만 박해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자기를 핍박했다고 했기 때문에 사울은 즉시 그가 예수님이고 자기가 박해하는 그분의 제자들과 초대교인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사실과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흘동안 그의 신앙체계는 완전히 거꾸로 뒤집혔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단순히 나사렛의 민중 선동자가 아니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곧 일어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시내로 들어가라는 명령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앞뒤 가리지 않는 박해의 질주를 가로막으시고, 그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단 한명이라도 체포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를 먼저 체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울의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붙들고 그의 마음에 비추었으며, 홍수처럼 그에게 밀려와 흘러 넘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 회심은 갑작스레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강제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들 둘러 비춘 ”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간섭은 돌연적이었지만 결코 이때가 처음으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행26장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회심한 사건을 설명할 때 행26:14절을 보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길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울을 고집 센 황소로 비유하고, 예수님 자신은 가시 돋친 채찍으로 그 황소를 길들이는 농부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 돋친 채찍처럼 그를 찌르고 쑤시면서 사울을 추격하고 계셨는데, 그가 저항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가시채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의심들이었습니다. 의식적으로는 예수님이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사기꾼으로 여기고 거부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그 예수님을 마음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풍문과 함께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성품과 주장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채찍은 스데반의 순교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풍문이 아니라 스데반이 재판받고 처형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건입니다. 그는 스데반이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그의 얼굴이 천사얼굴처럼 빛나는 것과, 그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과 순교 직전에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는 엄청난 주장을 자기 귀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집접 보고 그 음성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고 그를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높이셨다는 것을 깨닫고 아찔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그처럼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고 있는 행위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이 외적으로는 흠이 없는 도적적이고 율법적은 삶을 살았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생각, 동기, 욕망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마음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탐심을 갖지 말라는 열 번째 십계명이 그에게 죄를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그 탐심이란 말도 행동도 아니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예수님의 가시채에 뒷발질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수록 그 양심의 가시채가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랫동안 마음의 가시채로 사울을 추격해온 과정이 다메섹 도상에서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자기 의에 가득찬 바리새인 사울의 뻣뻣한 고개가 드디어 숙여지고 고집스런 황소가 길들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갑작스런 것도 아니고 강제적인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를 로봇으로 전락시키지 않았고 인격을 침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최면상태에서 억지로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어찌히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사울에게 그가 하는 일이 어리석고 악함을 제정신으로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예수님의 질문에 5절에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반문하고, 행22:10절에 “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이성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 시내로 들어가라 그러면 내가 그 다음에 할 일을 일러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요컨대 사울을 회심시킨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강제적이거나 갑작스럽지 않고 점진적이요 부드러운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난폭하지 않게 그분의 가시채를 가지고 사을의 마음을 찌르시고, 그 다음에 그분의 빛과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그를 압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자유롭게 반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만과 편견과 자기중심성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만하고, 반항적이며, 제멋대로 인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찬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아나니아를 만나 세례받고 다메섹에서 전도함 (10-25)
본문 10-25절을 보면 사울이 아나니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서 일어나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할 것을 이미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여기까지 와서 성도들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았다는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사울의 회심을 의심했습니다.
그러자 15,16절에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그 사람에게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있는 집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내용을 전하면서 안수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음식을 주니까 강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즉시 다메섹에 있는 각 유대인 회당으로 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도 좋다는 대제사장의 공문도 받아왔는데 어떻게 반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는가라고 그 유대인들은 매우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여러 날 동안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하니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다메섹 성문을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려 도망가도록 도왔습니다.
이처럼 사울과 아나니아의 만남은 세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사울은 그리스도인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시자 즉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어려운 사람들과 장소로 인도하실 때 조차도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4. 사울과 바나바의 만남(26-31)
사울은 다메섹에서 나와서 3년동안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기도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였으나 사울이 회심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3년 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단지 15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구하러 왔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사울을 데리고 가서 사도들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다메섹 길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사울에게 한 말씀과 다메섹에서 전도한 사실을 사도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가 신원보증을 하고 추천한 결과, 사울은 그리스도인 형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거기서 2주동안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출입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변론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것을 주도했던 그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대로 사울은 격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이 그것을 알고 가이샤라 항구로 데리고 가서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습니다.
본문 31절에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신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장 열정적인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하고 난 후에 교회는 짧은 평안의 시기를 누렸습니다. 모든 위기가 지난 후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고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복음은 확산되고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의 증언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그분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이심을 논증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사울의 증언은 성령의 권능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22절처럼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담대히 증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핵심기능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의 증언은 용감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그의 전파함에 담대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27절에 다메섹 회당에서 두 번째로는 28절에 예루살렘에서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회당 안에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토론했습니다.
넷째로, 사울의 증언은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온 성의 출구들이 다 봉쇄되었을 때 광주리를 타고 굴욕적으로 성벽을 내려와 탈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즉시 그 도시를 떠나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그를 데리고 가이사랴 연안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를 고향인 다소로 배를 태워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신분을 숨기로 7년간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행9장에서는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라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자신이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박해자 사울이 박해받는 사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서 사울이 어떻게 루스드라에서 돌을 맞고 다 죽게 되었다가 빌립보에 가서 매 맞고 투옥되었으며, 에베소의 대중폭동에 휘말렸다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투옥되고, 지중해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를 당하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구금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포함됩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고난은 참된 제자도의 상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반대와 핍박이 복음전파와 교회성장을 방해하지는 못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회심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처럼 완악한 저항자를 사로잡아 그를 ‘이리에서 양으로’ 완전히 변화시킨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보았습니다. 오늘날에서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지성과 인격이라는 천부적 재능들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개성과 활력과 진취성과 추진력을 갖고 있으며, 비기독교적 소신을 용기있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진실하지만 잘못된 사고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들을 말씀과 양심의 가시채로 찌르고, 그들을 결정적으로 붙드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개인이 회심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새생명을 가져다 준 그 은혜가 그를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처럼 회심하고 돌아와 주님의 제자와 증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각자를 위한 맞춤 사역을 하십니다. 바울이 아닌 어느 누구도 바울의 사역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각자의 능력이나 상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닏. 하나님은 각자의 상황과 달란트를 사용하여 사역을 위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나니아처럼 중요하거나 눈에 띄는 역할이 아닐 수도 있으나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일을 위해 ,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이루어야 할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연 바울처럼 고난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성찰해 보고 믿음의 확신가운데 사울처럼 전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사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참다운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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