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설교본문 | 롬14: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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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7-13 |
주일오전설교 250713 주를 위하여 행하라
본문: 롬14:5-12
제목: 주를 위하여 행하라
I. 서론
좋은 교회를 만들려면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견해가 다른 것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피해야 좋은 교회에서 기쁘게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롬14: 1-6절 말씀을 통해 이런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성도 간에 지켜야 할 원칙
롬14:1-6절에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지켜야 할 원칙을 다섯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구약의 형식에 얽매어 있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형식의 과정을 거쳐야 그 형식에 담긴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식에 얽매여 있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형식을 극복하여 본질에 충실한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식을 뛰어 넘어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다다를 경지를 보여주기에 우리의 모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셋째, 주님께서는 믿음이 미숙한 사람, 성숙한 사람 이 양쪽 모두를 다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 아이가 기어오든 걸어오든 오다가 넘어지든 다 기쁘게 받아주는 것과 같이 주님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넷째, 믿음이 미숙하거나 성숙하거나 주님께서 날마다 바로 세워가십니다. 미숙한 사람의 믿음을 성숙한 단계로 이끌어 가시고, 성숙한 사람의 믿음은 더 원숙한 경지로 올려주십니다.
다섯째,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형식을 따르든지, 본질을 따르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 14장은 이러한 원칙 위에서 끝까지 전개되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2.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라
우리가 형제를 내 생각대로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꼭 알아야 할 원칙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5절에 나옵니다. “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 교인들 중에 유대인 신자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과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 절기도 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헬라문화권에서 예수 믿고 돌아온 이방인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사도는 이것은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문제이므로 견해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하고 각각 자기 믿음대로 결정하고 소신대로 행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자기 신앙양심과 성경지식에 비추어 확신이 서는 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바울사도는 골2:16-17절에서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특정한 날이나 절기, 음식규례 등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지켰던 그림자 같은 것들입니다. 이제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 규례들은 물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2: 14-15절에도 “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제도의 쇠사슬을 끊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오랜 관습이나 전통 중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 부흥의 걸림돌이 되고 교인들 간의 갈등요소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주일성수, 집회, 교회절기, 헌금, 중직자 선출, 예배 시 악기사용 등 그 몇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조금 덧붙이면 주일 예배 마친 후에 오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도 각 개인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전도를 하든, 회사에 출근하든, 야구경기를 보러 가든, TV를 보든, 공부를 하든, 장사를 하든 각자 믿음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소신껏 양심적으로 하면 된다는 생각만으로 만족해버리면 크게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두 가지 조건을 달아놓았습니다. 이것이 본문 6-12절 말씀입니다. 본문 6절에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를 위하여’라는 어구가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 신앙양심에 따라 어떤 일을 하겠다고 할 때 분명한 조건 하나는 그것이 ‘주를 위하여’하는 일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양심상 거리끼는 것이 없다해도 그 동기나 목적이 주님 중심이라기보다 자기중심이라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나 주를 위하여 결정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 7-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주를 위하여’라는 어구에 두 번 더 나오는데 여기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하든지 미숙하든지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죽이게 됩니다. 예컨대 자기가 삶의 목적이 되면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되니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를 끼친 자기도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므로 자신도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가정주부가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기 시작하면 “내가 어쩌다 이 모양 이꼴이 되어 이런 집안에서 날마다 밥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 하는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게 되는가?”라고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외부에 두게 되면 자기가 하는 일이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일이 되므로 보람있는 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처럼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을 외부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그 목적이 바른 목적이 되고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살릴 수 있게 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어보면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라는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다섯가지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3:17절 말씀에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요리문답 1번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오감과 감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며 다른 성도들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되고 교회는 우리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 한 가족이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러한 가족관계 속에서 사랑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의 분량까지 자라가며 성화의 삶을 살도록 하셔서,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나 형편이 어떠하든지 지금의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섬김과 헌신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 사명이란 바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바로 세계복음화가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예수를 영접할 때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에 따라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인 생사문제도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모든 삶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동기와 목적이 ‘주를 위하여’가 아니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미국 아이들은 처음 태어나서 배우는 말이 ‘ME, 혹은 MY’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미국 아이들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자연인으로 태어날 때는 내가 삶의 중심이지만 예수믿고 거듭나면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 합니까? 그 답을 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죄의 지배 아래 노예로 살았던 우리를 예수 보혈의 피값을 주고 사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제 주님이 나의 주인이요 나의 소유주가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인 되신 주님께서 종된 우리에게 모두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면 내가 내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후5:15절에서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예수 믿는 순간부터는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고 나를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 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갈2:20절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에 항복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행복과 평강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어졌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힘으로 지탱하고,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행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예수 믿는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주님을 위하여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각자가 ‘주를 위하여’ 한 것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본문 10-12절에서 그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0절에는 “내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분명히 표현하지 않은 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권면에 따라 서로 바로잡고 충고하고 훈계는 하되, 비본질적인 문제 때문에 형제를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은 역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갈6: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7:5절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한 말씀에 비추어 형제가 바르게 권고하되 사랑이 없이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이 없이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 삶의 방향은 주님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숙하게 세워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주님을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주 안에 있는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긴 죄에 대하여 그 행위대로 엄중하게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는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45:23절을 인용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 꿇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을 입술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은 지금까지 말씀한 것의 궁극적 결론입니다. 직고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사실대로 낱낱이 아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 비판하는 자나 비판 받는 자 모두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는 믿는 자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 남김없이 다 낱낱이 보고하고 해명해야만 합니다. 남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기 전에, 우리 각자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직접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실제 행동은 자기 욕심과 영광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술마시는 사람들은 건배를 하면서 ‘위하여’를 외칩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하여 술을 마십니까? ‘건강을 위하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건강을 해치는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개인적 종말의 시간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죽음 후에 관 속에 누울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허무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 행하고 살아갈 때만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내 삶도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모든 것이 행한대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정말 주를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우리 입으로 하나님께 직접 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대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직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주를 위하여’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주를 위하여 살아온 사람은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겠지만 입으로만 주를 위하여 산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받을 것입니다. 다른 형제가 정말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부로 다른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계20:12-15절을 보면 우리가 행한 일이 기록된 책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모든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책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있는 사람만이 지옥 형벌을 피하게 됩니다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책은 정죄의 책입니다. 그 정죄의 책에 낱낱이 적힌 죄로 인해 지옥 불못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도 그 행위를 기록한 책에 형제를 대한 모습이 기록될 것이고 그 기록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거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지옥형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그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거나 훈계할 수는 있지만, 비판하거나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그가 천국에 가도록 도와야지 형제를 넘어뜨려 천국가는 길을 방해할 정도로 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받은 그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인내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더욱 사랑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직접 답을 얻을 수 없는 모호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신앙과 믿음에 따라 결정할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에게는 자기 소신껏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형제를 보살피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가 있다 할지라도 그 동기와 목적은 반드시 ‘주를 위하여’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우리가 과연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주를 위하여 행했는지는 오직 주님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과연 이것이 주를 위한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보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자기가 내린 결정에 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임을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하고 행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주를 위해 하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른 형제를 비판하지말고 모든 일을 주를 위해 행하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됨을 명심하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전설교 250713 주를 위하여 행하라
본문: 롬14:5-12
제목: 주를 위하여 행하라
I. 서론
좋은 교회를 만들려면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견해가 다른 것 때문에 서로 갈등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피해야 좋은 교회에서 기쁘게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롬14: 1-6절 말씀을 통해 이런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성도 간에 지켜야 할 원칙
롬14:1-6절에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지켜야 할 원칙을 다섯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구약의 형식에 얽매어 있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형식의 과정을 거쳐야 그 형식에 담긴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형식에 얽매여 있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형식을 극복하여 본질에 충실한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식을 뛰어 넘어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다다를 경지를 보여주기에 우리의 모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셋째, 주님께서는 믿음이 미숙한 사람, 성숙한 사람 이 양쪽 모두를 다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 아이가 기어오든 걸어오든 오다가 넘어지든 다 기쁘게 받아주는 것과 같이 주님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넷째, 믿음이 미숙하거나 성숙하거나 주님께서 날마다 바로 세워가십니다. 미숙한 사람의 믿음을 성숙한 단계로 이끌어 가시고, 성숙한 사람의 믿음은 더 원숙한 경지로 올려주십니다.
다섯째,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형식을 따르든지, 본질을 따르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 14장은 이러한 원칙 위에서 끝까지 전개되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2.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라
우리가 형제를 내 생각대로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꼭 알아야 할 원칙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5절에 나옵니다. “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로마교회 교인들 중에 유대인 신자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과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 절기도 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헬라문화권에서 예수 믿고 돌아온 이방인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게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사도는 이것은 믿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문제이므로 견해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하고 각각 자기 믿음대로 결정하고 소신대로 행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자기 신앙양심과 성경지식에 비추어 확신이 서는 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바울사도는 골2:16-17절에서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특정한 날이나 절기, 음식규례 등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지켰던 그림자 같은 것들입니다. 이제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림자에 불과한 그런 규례들은 물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2: 14-15절에도 “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제도의 쇠사슬을 끊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오랜 관습이나 전통 중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 부흥의 걸림돌이 되고 교인들 간의 갈등요소가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주일성수, 집회, 교회절기, 헌금, 중직자 선출, 예배 시 악기사용 등 그 몇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조금 덧붙이면 주일 예배 마친 후에 오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도 각 개인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전도를 하든, 회사에 출근하든, 야구경기를 보러 가든, TV를 보든, 공부를 하든, 장사를 하든 각자 믿음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소신껏 양심적으로 하면 된다는 생각만으로 만족해버리면 크게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두 가지 조건을 달아놓았습니다. 이것이 본문 6-12절 말씀입니다. 본문 6절에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를 위하여’라는 어구가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 신앙양심에 따라 어떤 일을 하겠다고 할 때 분명한 조건 하나는 그것이 ‘주를 위하여’하는 일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양심상 거리끼는 것이 없다해도 그 동기나 목적이 주님 중심이라기보다 자기중심이라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나 주를 위하여 결정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 7-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주를 위하여’라는 어구에 두 번 더 나오는데 여기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하든지 미숙하든지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죽이게 됩니다. 예컨대 자기가 삶의 목적이 되면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되니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를 끼친 자기도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므로 자신도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가정주부가 삶의 목적을 자신에게 두기 시작하면 “내가 어쩌다 이 모양 이꼴이 되어 이런 집안에서 날마다 밥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 하는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게 되는가?”라고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외부에 두게 되면 자기가 하는 일이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살피는 일이 되므로 보람있는 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처럼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을 외부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그 목적이 바른 목적이 되고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살릴 수 있게 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어보면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라는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다섯가지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3:17절 말씀에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요리문답 1번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오감과 감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며 다른 성도들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되고 교회는 우리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여 한 가족이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러한 가족관계 속에서 사랑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의 분량까지 자라가며 성화의 삶을 살도록 하셔서,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나 형편이 어떠하든지 지금의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섬김과 헌신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 사명이란 바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바로 세계복음화가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는 예수를 영접할 때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에 따라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인 생사문제도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모든 삶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동기와 목적이 ‘주를 위하여’가 아니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미국 아이들은 처음 태어나서 배우는 말이 ‘ME, 혹은 MY’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미국 아이들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자연인으로 태어날 때는 내가 삶의 중심이지만 예수믿고 거듭나면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 합니까? 그 답을 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죄의 지배 아래 노예로 살았던 우리를 예수 보혈의 피값을 주고 사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제 주님이 나의 주인이요 나의 소유주가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인 되신 주님께서 종된 우리에게 모두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면 내가 내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후5:15절에서 “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예수 믿는 순간부터는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고 나를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 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갈2:20절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에 항복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행복과 평강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어졌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힘으로 지탱하고,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행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예수 믿는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주님을 위하여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각자가 ‘주를 위하여’ 한 것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본문 10-12절에서 그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0절에는 “내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분명히 표현하지 않은 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권면에 따라 서로 바로잡고 충고하고 훈계는 하되, 비본질적인 문제 때문에 형제를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은 역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갈6:1절에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7:5절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관한 한 말씀에 비추어 형제가 바르게 권고하되 사랑이 없이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이 없이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 삶의 방향은 주님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숙하게 세워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주님을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주 안에 있는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긴 죄에 대하여 그 행위대로 엄중하게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는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45:23절을 인용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 꿇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을 입술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12절 말씀은 지금까지 말씀한 것의 궁극적 결론입니다. 직고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사실대로 낱낱이 아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강한 자나 약한 자, 비판하는 자나 비판 받는 자 모두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는 믿는 자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 남김없이 다 낱낱이 보고하고 해명해야만 합니다. 남을 업신여기거나 비판하기 전에, 우리 각자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직접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실제 행동은 자기 욕심과 영광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술마시는 사람들은 건배를 하면서 ‘위하여’를 외칩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하여 술을 마십니까? ‘건강을 위하여’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건강을 해치는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개인적 종말의 시간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죽음 후에 관 속에 누울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허무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 행하고 살아갈 때만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내 삶도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모든 것이 행한대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정말 주를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우리 입으로 하나님께 직접 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대 앞에서 자기가 한 일을 직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주를 위하여’ 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주를 위하여 살아온 사람은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겠지만 입으로만 주를 위하여 산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받을 것입니다. 다른 형제가 정말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부로 다른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계20:12-15절을 보면 우리가 행한 일이 기록된 책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모든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책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있는 사람만이 지옥 형벌을 피하게 됩니다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책은 정죄의 책입니다. 그 정죄의 책에 낱낱이 적힌 죄로 인해 지옥 불못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도 그 행위를 기록한 책에 형제를 대한 모습이 기록될 것이고 그 기록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거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지옥형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그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거나 훈계할 수는 있지만, 비판하거나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그가 천국에 가도록 도와야지 형제를 넘어뜨려 천국가는 길을 방해할 정도로 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받은 그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인내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더욱 사랑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직접 답을 얻을 수 없는 모호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신앙과 믿음에 따라 결정할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에게는 자기 소신껏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형제를 보살피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가 있다 할지라도 그 동기와 목적은 반드시 ‘주를 위하여’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우리가 과연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주를 위하여 행했는지는 오직 주님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과연 이것이 주를 위한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보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자기가 내린 결정에 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임을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하고 행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주를 위해 하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다른 형제를 비판하지말고 모든 일을 주를 위해 행하되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됨을 명심하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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