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믿음을 따라 행하라
2025-07-21 16:07:37
홍기칠
조회수   24
설교본문 롬14:13-23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7-20

주일오전설교 250720 믿음을 따라 행하라

본문: 14: 13-23

제목: 믿음을 따라 행하라

 

I. 서론

지난 주 롬14: 5-12절 말씀을 살펴보면서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 자기 믿음대로 확신을 가지고 행하되 그것이 항상 주를 위하여 하는 행동인지 살펴보고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사나 죽으나 다 주님의 소유된 자들, 즉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경에서 명백한 진리인지 아닌지 모호한 것들은 자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행할 수 있으나, 그것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피하라는 것과 믿음이 약한 형제들도 자기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행하거나 믿음이 강한 자들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면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형제를 실족케 하지말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이 왜 죄인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라

본문 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런즉이라는 말은 1-12절 내용을 말합니다. , 내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지, 바른 믿음으로 행한 것인지 날마다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욕심을 위해 행한 것이라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옳다고만 주장하며 상대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칠 것이란 장애물이나 덫을 가리키는데 형제를 근심하게 만들거나 망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영적으로 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고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한 초신자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므로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한다면, 초신자가 다시 마음 놓고 술을 마시다가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그러한 행동이 믿음이 약한 자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되어 영적으로 그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서로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까? 14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음식은 속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어떤 음식은 속되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말 속되므로,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그 사람을 걸려 넘어지도록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물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고, 바울 자신도 그렇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율법의 낡은 사상이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특정 음식을 먹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들을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믿음이 약한 자는 근심에 쌓이게 되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강한 자 자신의 신념에서는 문제가 없겠지만, 사랑의 측면에서는 잘못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형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없는 행위입니다. 형제를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말라는 것은 그가 신앙적 양심을 상하게 하여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성도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피로 값주고 그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고 자신들의 행동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효력이 발휘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는 선한 양심의 자유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함으로써 그 믿음과 양심의 자유가 오히려 비방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슬람권에 있는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속되다고 여기고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무슬림이 예수를 믿고자 교회에 나왔는데 그 사람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그에게 먹도록 권한다면 그 사람은 매우 혐오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혹은 종교적 믿음으로나 개인적 건강의 이유로 채식만 하는 사람이 교회에 나왔을 때 억지로 고기를 먹게 한다면 그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바울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자체가 속된 것이 없지만 그것을 속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속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속된 것은 아니라 해도 먹어서 해로운 음식은 먹어서는 안되지만, 사실 속된 음식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음식으로 인해 넘어지게 하고 실족시키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술을 가끔 마시는 성도 중에 엡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말씀을 근거로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술 마시는 것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술 취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마셔야 취하는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술 취하는 것은 처음 마신 그 한 잔부터가 사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 됩니다.

 

23:29-35절을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며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쓴 솔로몬 왕도 술을 마시고 추태를 보였기 때문에 아예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술은 뱀같이 물고 독사 같이 쏘며 횡설수설하게 만들고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이 위태롭고 감각이 없어지니 다시 술을 찾게 된다고 술의 부정적 영향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술은 대부분 온갖 일탈행위와 범죄행위와 연관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술 마시는 것이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음주운전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음주운전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성도나 목사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을 참 믿음이 좋다고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16절에 자신은 선한 동기로 어떤 음식이나 술을 먹고 마셨다고 해도 비방을 받는다면 그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술을 마실 자유가 있지만 마시지 않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는 두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먼저 한국교회사적 상황입니다. 선교사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던 초창기에는 술과 담배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술 담배를 해서는 신앙생활을 도무지 건전하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여 술독에 빠지고, 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하는 등 나라가 멍들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1901년 장로교 선교사공의회는 신앙생활의 지침서를 만들어 금주 금연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신앙지침서에는 7대 강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배 출석을 철저히 할 것, 2) 성수 주일 할 것, 3) 부모에게 효도할 것 4) 일부 일처를 지킬 것, 5) 자기 가족을 반드시 구원할 것 6) 근면 성실할 것, 7) 금주 금연할 것 등입니다.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담배를 피우는 자는 절대로 장로로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공포했습니다. 이것이 지난 백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술을 금하게 된 두 번째 배경은 사회적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는 술을 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사회에 온갖 불의, 악행, 부정부패 사건에 술이 끼어들지 않은 예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술은 우리에게 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칩니다. 우리나라 한 해 음주량이 엄청납니다. 2024년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순수 알코올 소비량은 15세 이상의 경우 약 8.2리터나 됩니다. 소주 한병 360ml로 계산하면 약 22병에 해당합니다. 5천만 국민이 연간 각각 22병의 소주를 마시고 있는 셈이 됩니다. 술 뿐만 아니라 흡연, 도박,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휴대폰이나 인테넷 도박과 마약구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백해무익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불신자들 앞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 잘 믿어도 별 수 없네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시험을 받아 예수 믿을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초신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그가 실망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술 마시며 방탕하던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본문 14절에는 마음에 가책을 받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정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술, 담배, 마약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2. 덕을 세우라

본문 17절에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내용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초점이 있습니다. ,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인 의가 행해지고 있는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평화로운 관계인 평강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희락이 넘치는 인간관계인 진정한 기쁨이 있는가? 하는 세가지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없이 남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며, 음식문제로 다투는 것은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하며, 자기가 먹는 음식 때문에 기뻐하거나 근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화평의 관계를 맺고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만 사랑의 바탕 위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형제를 섬기는 사람은 형제와 더불어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어 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를 위하여 자기를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하려고 힘쓸수록 하나님의 복이 따라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이 축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집트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신 앞에 서면 그 신이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다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이 너가 살아온 인생이 즐겁고 기뻤니?” 그렇다면 그런 기쁨으로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해 주었니?”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의 삶도 내가 기뻐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하는 삶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는 당연히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화평은 의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므로 불의나 거짓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를 행하기 위해 형제를 비판해서는 그 의가 칼이 됩니다. 대신에 의를 행하되 화평과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의를 행하다가 불이익과 손해를 당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 속에 기쁨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은 그 사람 속에 화평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고 성도 간의 조화를 이루는 모든 일을 다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시작해서 사람과의 화평으로 귀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화평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화평하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더불어 화평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덕을 세우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덕을 세우는 일을 말을 직역하면 집을 세우는 일이 됩니다. 마치 집을 세우는 것처럼 각 개인의 영적인 성장 뿐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화평을 이루는 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해가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쓸데없는 비판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은 개인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파괴하는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위에 기초를 세우면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 화평을 이루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다시 음식 문제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 즉 하나님의 일이란 구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에게 계속 구원사역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러 종류의 건축자재들을 사로 잘 연결하여 건물을 세워 나가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협력하여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단결이 깨어지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까지 무너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는 구절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며, 필요하다면 자유까지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 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포도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으면 함께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결국에는 술에 취하여 자연히 덕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전 8:12-13절에서 형제에게 조금이라도 거리낌을 주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포하며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전10: 23-24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음주, 흡연, 마약, 도박 이런 것들은 불신자들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3.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죄

본문 22절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깊이 판단하여 행동하면서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 ,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3절은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죄를 가장 예리하고 통렬하게 정의한 것입니다. 먹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이 이것을 먹으면 혹시 죄가 되지 아닐까 의심하면서 먹는다면, 이미 죄가 된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고 의심을 품으면서 먹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진실하지 못하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선적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과 자신을 속이고 신실치 못한 것은 모두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지 않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은 결국 죄의 뿌리는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모든 죄악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끔찍한 모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며 가장 큰 죄입니다. 죄는 단순히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나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위반한 정도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가 되기 때문에 그 범위는 훨씬 포괄적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23절 말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고 그분에게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분의 용서와 소망을 받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불신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도 분명히 죄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먹고 마시는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행동이라고 해도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할 만한 행동은 삼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믿음을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불신의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른 믿음으로 행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을 몇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 일을 행하는 자세가 신실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태만하게 하면 안됩니다. 정말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 하는 일에서는 불량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둘째, 행위의 기반이 말씀이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둔 행위가 아닐 때는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욕망으로 행한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행위가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가져와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하다고 하면서 나의 유익만 있고 나에게만 기쁨이 된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넷째, 일을 행하는 방법이 정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 그 방법과 과정이 반드시 선하고 의롭고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한마디로 믿음대로 사는 사람, 믿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불신하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믿음이 연약한 성도가 실족하지 않게 나의 언행을 조심하고 덕을 세우며 모든 일을 믿음을 따라 행하는 전도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일오전설교 250720 믿음을 따라 행하라

본문: 14: 13-23

제목: 믿음을 따라 행하라

 

I. 서론

지난 주 롬14: 5-12절 말씀을 살펴보면서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 자기 믿음대로 확신을 가지고 행하되 그것이 항상 주를 위하여 하는 행동인지 살펴보고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사나 죽으나 다 주님의 소유된 자들, 즉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경에서 명백한 진리인지 아닌지 모호한 것들은 자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행할 수 있으나, 그것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피하라는 것과 믿음이 약한 형제들도 자기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행하거나 믿음이 강한 자들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면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형제를 실족케 하지말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이 왜 죄인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라

본문 13절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런즉이라는 말은 1-12절 내용을 말합니다. , 내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지, 바른 믿음으로 행한 것인지 날마다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욕심을 위해 행한 것이라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옳다고만 주장하며 상대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칠 것이란 장애물이나 덫을 가리키는데 형제를 근심하게 만들거나 망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가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영적으로 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고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한 초신자 앞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죄가 아니므로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한다면, 초신자가 다시 마음 놓고 술을 마시다가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그러한 행동이 믿음이 약한 자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되어 영적으로 그를 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서로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까? 14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음식은 속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어떤 음식은 속되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말 속되므로,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그 사람을 걸려 넘어지도록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물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고, 바울 자신도 그렇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율법의 낡은 사상이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특정 음식을 먹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들을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믿음이 약한 자는 근심에 쌓이게 되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믿음이 강한 자 자신의 신념에서는 문제가 없겠지만, 사랑의 측면에서는 잘못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형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없는 행위입니다. 형제를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말라는 것은 그가 신앙적 양심을 상하게 하여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성도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피로 값주고 그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고 자신들의 행동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효력이 발휘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는 선한 양심의 자유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함으로써 그 믿음과 양심의 자유가 오히려 비방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슬람권에 있는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속되다고 여기고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무슬림이 예수를 믿고자 교회에 나왔는데 그 사람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그에게 먹도록 권한다면 그 사람은 매우 혐오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혹은 종교적 믿음으로나 개인적 건강의 이유로 채식만 하는 사람이 교회에 나왔을 때 억지로 고기를 먹게 한다면 그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바울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자체가 속된 것이 없지만 그것을 속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속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속된 것은 아니라 해도 먹어서 해로운 음식은 먹어서는 안되지만, 사실 속된 음식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음식으로 인해 넘어지게 하고 실족시키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술을 가끔 마시는 성도 중에 엡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말씀을 근거로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술 마시는 것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술 취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마셔야 취하는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술 취하는 것은 처음 마신 그 한 잔부터가 사실 술이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 됩니다.

 

23:29-35절을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며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글을 쓴 솔로몬 왕도 술을 마시고 추태를 보였기 때문에 아예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술은 뱀같이 물고 독사 같이 쏘며 횡설수설하게 만들고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이 위태롭고 감각이 없어지니 다시 술을 찾게 된다고 술의 부정적 영향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술은 대부분 온갖 일탈행위와 범죄행위와 연관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술 마시는 것이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음주운전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음주운전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성도나 목사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을 참 믿음이 좋다고 인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16절에 자신은 선한 동기로 어떤 음식이나 술을 먹고 마셨다고 해도 비방을 받는다면 그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술을 마실 자유가 있지만 마시지 않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는 두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먼저 한국교회사적 상황입니다. 선교사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던 초창기에는 술과 담배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술 담배를 해서는 신앙생활을 도무지 건전하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여 술독에 빠지고, 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하는 등 나라가 멍들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1901년 장로교 선교사공의회는 신앙생활의 지침서를 만들어 금주 금연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신앙지침서에는 7대 강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배 출석을 철저히 할 것, 2) 성수 주일 할 것, 3) 부모에게 효도할 것 4) 일부 일처를 지킬 것, 5) 자기 가족을 반드시 구원할 것 6) 근면 성실할 것, 7) 금주 금연할 것 등입니다.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담배를 피우는 자는 절대로 장로로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공포했습니다. 이것이 지난 백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술을 금하게 된 두 번째 배경은 사회적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는 술을 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사회에 온갖 불의, 악행, 부정부패 사건에 술이 끼어들지 않은 예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술은 우리에게 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칩니다. 우리나라 한 해 음주량이 엄청납니다. 2024년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순수 알코올 소비량은 15세 이상의 경우 약 8.2리터나 됩니다. 소주 한병 360ml로 계산하면 약 22병에 해당합니다. 5천만 국민이 연간 각각 22병의 소주를 마시고 있는 셈이 됩니다. 술 뿐만 아니라 흡연, 도박,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휴대폰이나 인테넷 도박과 마약구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백해무익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불신자들 앞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 잘 믿어도 별 수 없네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시험을 받아 예수 믿을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초신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그가 실망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술 마시며 방탕하던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본문 14절에는 마음에 가책을 받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정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술, 담배, 마약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2. 덕을 세우라

본문 17절에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내용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초점이 있습니다. ,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인 의가 행해지고 있는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평화로운 관계인 평강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희락이 넘치는 인간관계인 진정한 기쁨이 있는가? 하는 세가지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없이 남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며, 음식문제로 다투는 것은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하며, 자기가 먹는 음식 때문에 기뻐하거나 근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화평의 관계를 맺고 기쁨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만 사랑의 바탕 위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형제를 섬기는 사람은 형제와 더불어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어 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를 위하여 자기를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하려고 힘쓸수록 하나님의 복이 따라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이 축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집트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신 앞에 서면 그 신이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다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신이 너가 살아온 인생이 즐겁고 기뻤니?” 그렇다면 그런 기쁨으로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해 주었니?”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의 삶도 내가 기뻐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하는 삶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성도는 당연히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화평은 의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이므로 불의나 거짓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를 행하기 위해 형제를 비판해서는 그 의가 칼이 됩니다. 대신에 의를 행하되 화평과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의를 행하다가 불이익과 손해를 당할지라도 그 사람의 삶 속에 기쁨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은 그 사람 속에 화평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고 성도 간의 조화를 이루는 모든 일을 다 포함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시작해서 사람과의 화평으로 귀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화평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화평하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더불어 화평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덕을 세우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덕을 세우는 일을 말을 직역하면 집을 세우는 일이 됩니다. 마치 집을 세우는 것처럼 각 개인의 영적인 성장 뿐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화평을 이루는 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해가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쓸데없는 비판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은 개인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파괴하는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위에 기초를 세우면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 화평을 이루는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다시 음식 문제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 즉 하나님의 일이란 구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연약한 믿음의 성도들에게 계속 구원사역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러 종류의 건축자재들을 사로 잘 연결하여 건물을 세워 나가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협력하여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단결이 깨어지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까지 무너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는 구절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며, 필요하다면 자유까지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 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포도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으면 함께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결국에는 술에 취하여 자연히 덕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전 8:12-13절에서 형제에게 조금이라도 거리낌을 주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포하며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전10: 23-24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음주, 흡연, 마약, 도박 이런 것들은 불신자들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3.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죄

본문 22절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깊이 판단하여 행동하면서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 ,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3절은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죄를 가장 예리하고 통렬하게 정의한 것입니다. 먹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이 이것을 먹으면 혹시 죄가 되지 아닐까 의심하면서 먹는다면, 이미 죄가 된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고 의심을 품으면서 먹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진실하지 못하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선적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과 자신을 속이고 신실치 못한 것은 모두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지 않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은 결국 죄의 뿌리는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모든 죄악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끔찍한 모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며 가장 큰 죄입니다. 죄는 단순히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나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위반한 정도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가 되기 때문에 그 범위는 훨씬 포괄적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23절 말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고 그분에게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분의 용서와 소망을 받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불신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도 분명히 죄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먹고 마시는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행동이라고 해도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하게 할 만한 행동은 삼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믿음을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불신의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른 믿음으로 행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을 몇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 일을 행하는 자세가 신실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서 태만하게 하면 안됩니다. 정말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 하는 일에서는 불량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둘째, 행위의 기반이 말씀이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둔 행위가 아닐 때는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욕망으로 행한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행위가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유익을 가져와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하다고 하면서 나의 유익만 있고 나에게만 기쁨이 된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넷째, 일을 행하는 방법이 정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면 그 방법과 과정이 반드시 선하고 의롭고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한마디로 믿음대로 사는 사람, 믿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불신하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믿음이 연약한 성도가 실족하지 않게 나의 언행을 조심하고 덕을 세우며 모든 일을 믿음을 따라 행하는 전도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제목 설교본문 설교일 설교자
75 소중한 평신도 동역자들 롬16:1-16 2025-08-17 홍기칠 목사
74 바울의 최종 헌신과 선교비전 롬15:22-33 2025-08-10 홍기칠 목사
73 바울의 선교 롬15:14-21 2025-08-03 홍기칠 목사
72 모든 열방이 주님께 영광을 롬15:1-13 2025-07-27 홍기칠 목사
71 믿음을 따라 행하라 롬14:13-23 2025-07-20 홍기칠 목사
70 주를 위하여 행하라 롬14:5-12 2025-07-13 홍기칠 목사
69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 롬14:1-6 2025-07-06 홍기칠 목사
68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롬13:11-14 2025-06-29 홍기칠 목사
67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롬13:8-10 2025-06-22 홍기칠 목사
66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롬13:1-7 2025-06-15 홍기칠 목사
65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롬12:14-21 2025-06-08 홍기칠 목사
64 사랑으로 봉사하라 롬12:9-13 2025-06-01 홍기칠 목사
63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라 롬12:3-8 2025-05-25 홍기칠 목사
62 구원받은 자의 삶 롬12:1-2 2025-05-18 홍기칠 목사
61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의 신비 롬11:25-36 2025-05-11 홍기칠 목사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