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2025-06-29 20:59:36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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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롬13:11-14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6-29

주일오전설교 250629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 13: 11-14

제목: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 우리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롬13: 8-10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종말의식과 더불어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2천년 전에 살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지금 여기 사는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종말의식을 갖고 삽니다. 성령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들의 마음에 마지막이 가까이 왔구나, 준비해야겠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 종말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종말을 준비해야 할지를 간단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우주적 종말과 개인의 종말

오늘 본문 11절에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기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스는 인간이 임의로 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이 카이로스를 분별하고, 카이로스에 대비하고, 카이로스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는 어떤 때를 의미합니까?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바로 종말을 의미합니다. 즉 종말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900여년 전에 살았던 바울이 이처럼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고 말씀하면서 긴장하고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이 알고 있던 사실은 약 1,900여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충만을 받은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지금이 바로 종말이 가까워진 시기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종말에는 우주적 종말이 있고, 개인적 종말이 있습니다. 우주적 종말이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 세상의 역사가 종결되는 날입니다. 13:32절에는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권한을 가지고 정해놓으신 절대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앞당길 수도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24:14절에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4:42절에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비로소 마지막 때가 온다고 가르치시고는 곧바로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의 때와 비슷합니다.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한번 죽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확정되어있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정해진 죽음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이요, 현재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이라도 우리 각자는 개인적 종말을 맞이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개인적 종말이건 우주적 종말이건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카이로스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종말이 언제가 될지 알지 못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믿었든지 상관없이 주님을 믿었던 시점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종말이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개인적인 종말의 카이로스를 인식하는 사람만이 지금 이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바로 알고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의미없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가치있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믿는 그날부터 오늘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영적 수면상태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새날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자는 것과 깨어 있는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 앞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내 곁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시고 진리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이 세상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밤늦게 까지 열심히 일한다 해도 실은 잠이 든 것과 같습니다. 둘째,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깨달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잠자는 사람입니다.

 

2. 종말을 맞이할 준비

1) 어둠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잠에서 깨어 새날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12절을 봅시다.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습니다. 벗고 입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곧 날이 새기 직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속히 우리가 잠잘 때 입는 옷과 일어나서 입는 옷이 다르듯이 벗을 것을 벗고 입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벗어야 할 어둠의 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벗어야 할 옷은 어둠의 일과 정욕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사실 전부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의 옷입니다. 본문 14절에도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욕의 세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첫째, 방탕하고 술취하는 정욕은 술 마시는 것에 대한 과도한 욕망, 약물남용(알콜마약, 담배, 카페인 중독)을 불러옵니다.

둘째, 음란하거나 호색하는 정욕은 성에 대한 과도한 욕망인 간음, 간통, 근친상간, 수간, 포르노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셋째, 다투거나 시기하는 정욕은 남에게 주목받고 우위를 점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다툼과 시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들은 14절 하반절 말씀처럼 머릿속에 이러한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은 자기 삶에 분명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어제 뉴스에서도 어느 40대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것을 어린 자녀가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60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살해하고도 경찰에 체포되어 가면서도 자기가 한 행동을 반성하기닌 켜녕 오히려 잘한 행동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무정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

그렇다면 입어야 할 옷은 무엇입니까? . 본문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려면 본문 13-14절의 말씀처럼 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머리 속의 생각이 정욕으로 이끌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옷을 입되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낮에는 빛에 의해 자기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나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로 잡는 것,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단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정히 행한다는 것은 세가지 뜻이 있는데, 어울리게 행동하는 것과 예의를 다 하는 것과 고상하게 행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울리는 품행을 갖추어야 하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보다 더 고상한 것은 없기 때문에 생각과 품행이 항상 진리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볼 때 과거보다 더 단정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동안 잠 잔 것과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믿는 사람답다, 주님 오실 날을 기다라는 사람답다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말세를 의식하고 사는 성령의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모르고 불신 속에 잠들어 있을때는 어둠의 일을 옷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불신의 몽매함에서 깨우시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세주요 인생의 보화로 삼고 전투를 위한 갑옷을 입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은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전쟁을 치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낮의 자녀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과 같습니다. 살전 5:7-8절에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빛의 갑옷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 세상은 우리를 잘 달래어 세상 재미에 흠뻑 빠진채 잠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이러한 잠에서 깨어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옷을 입고 전투를 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TV, 광고, , , 성공, 칭찬이라는 수면제의 힘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보호자로 옷 입고, 예수님을 나의 소망으로 삼아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로 옷 입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최고의 보화로 옷입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옷을 입는 것이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소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오기 때문에 구원과 부활과 천국의 약속을 기억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오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입으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한 사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은 2천년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보고 회심했기 때문에 유명한 구절이 되었습니다. 방탕아 어거스틴이 성 어거스틴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본문 13,14절입니다. 그는 주후 354년 이교도 아버지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철저하게 어머니로부터 기독교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거스틴의 지적 수준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이의 질문에 답을 주려하지 않고 무조건 믿음을 강요했습니다. 여기에 회의를 느낀 어거스틴은 교회를 떠나 합리적인 답을 주는 마니교로 가서 9년 동안 그 종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다가 29세가 되어 마니교 교주 파우스트를 만나 장시간 면담을 했는데 면담 결과 마니교에 진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실망을 느껴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30세에 밀라노에 가서 그 지역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십년동안 멀리했던 성경을 다시 가져와 바울서신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2년 동안 공부하면서 말할 수 없는 갈등을 느꼈습니다. 20여년 동안 과거의 잘못된 습관에 익숙해져버린 정신상태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고 갈등하고 고민하며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밀나노의 한 정원에 앉아 있던 그가 우연히 아이들이 톨레 레게 톨레 레게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그 뜻은 들어서 읽으라는 뜻입니다. 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습니다. 그래서 급히 성경을 가져와 폈는데 오늘 본문 13-14절 말씀을 읽게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이 헌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헌옷을 벗어 버리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갈등과 번민과 고통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들고 오늘 본문 13-14절을 읽은 뒤 더 이상 읽어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확신의 빛으로 그의 마음을 비추어 그 속에 있던 모든 어둠을 물리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완전한 평온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속물 어거스틴이 성 어거스틴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어떤 옷도 아닌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밀라노 교회에서 주교로 있던 성 암부로시우스가 어느날 모니카가 집에 가지 않고 계속 울고 있으니까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모니카가 제 아들이 예수 믿으라고 했지만 끝까지 반대하므로 계속 기도하는 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주교가 여인이여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위로를 얻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약 6개월 후에 어거스틴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날로부터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데 그때가 32세였습니다. 그 이전의 모든 날들은 의미없이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종말의 시기

지금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기입니다. 죄와 고통과 죽음이 있는 이 세대와 의와 기쁨과 생명이 있는 장차 올 세대가 서로 겹쳐있습니다. 또한 흑암의 다스림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로 겹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어둠과 죄악으로 가득찬 이 종말의 때임에도 몽유병 환자, 마약중독자처럼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사는 불신자들에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며 구원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속히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는 날이 종말이 오거나 혹은 개인의 종말이 오면 그들은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들을 깊은 잠에서 깨워 속히 구원받도록 구원의 나팔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빚을 갚는 일입니다. 아직 어둠속에서 잠자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속히 알리고 구원의 빛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도록, 구원받도록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개인의 카이로스 시간이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카이로스가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이 나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있을 동안 우리는 어둠의 옷과 이 세상의 모든 옷을 벗고 빛의 갑옷,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 종말의 카이로스가 오면 떳떳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옛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거스틴처럼 고민하십시오. 어거스틴처럼 주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부르짖고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은혜의 빛을 잠자는 여러분의 심령에 환하게 비우처 주시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디 않는 경건한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어둠의 잠에서 깨어나 역사의 종말, 개인의 종말을 준비하며 낮에처럼 단정히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우리는 자기의 사랑의 빚을 갚는 사명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도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세상사람들에게 예수 재림의 종말, 각 개인의 종말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며 속히 그 잠에서 깨어나 빛의 갑옷, 그리스도로 옷입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절박한 심정으로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성령께서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사람답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단정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세상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애타는 심정으로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일오전설교 250629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 13: 11-14

제목: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 우리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제목으로 롬13: 8-10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종말의식과 더불어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2천년 전에 살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지금 여기 사는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종말의식을 갖고 삽니다. 성령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들의 마음에 마지막이 가까이 왔구나, 준비해야겠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 종말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고 종말을 준비해야 할지를 간단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우주적 종말과 개인의 종말

오늘 본문 11절에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기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스는 인간이 임의로 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이 카이로스를 분별하고, 카이로스에 대비하고, 카이로스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는 어떤 때를 의미합니까?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바로 종말을 의미합니다. 즉 종말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900여년 전에 살았던 바울이 이처럼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고 말씀하면서 긴장하고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이 알고 있던 사실은 약 1,900여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충만을 받은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지금이 바로 종말이 가까워진 시기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종말에는 우주적 종말이 있고, 개인적 종말이 있습니다. 우주적 종말이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 세상의 역사가 종결되는 날입니다. 13:32절에는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권한을 가지고 정해놓으신 절대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앞당길 수도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24:14절에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4:42절에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비로소 마지막 때가 온다고 가르치시고는 곧바로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의 때와 비슷합니다.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한번 죽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확정되어있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정해진 죽음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이요, 현재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이라도 우리 각자는 개인적 종말을 맞이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개인적 종말이건 우주적 종말이건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카이로스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종말이 언제가 될지 알지 못합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믿었든지 상관없이 주님을 믿었던 시점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종말이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개인적인 종말의 카이로스를 인식하는 사람만이 지금 이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바로 알고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의미없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가치있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믿는 그날부터 오늘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영적 수면상태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 새날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자는 것과 깨어 있는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 앞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내 곁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시고 진리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이 세상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밤늦게 까지 열심히 일한다 해도 실은 잠이 든 것과 같습니다. 둘째,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깨달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잠자는 사람입니다.

 

2. 종말을 맞이할 준비

1) 어둠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잠에서 깨어 새날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12절을 봅시다.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습니다. 벗고 입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곧 날이 새기 직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속히 우리가 잠잘 때 입는 옷과 일어나서 입는 옷이 다르듯이 벗을 것을 벗고 입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벗어야 할 어둠의 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벗어야 할 옷은 어둠의 일과 정욕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사실 전부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의 옷입니다. 본문 14절에도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욕의 세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첫째, 방탕하고 술취하는 정욕은 술 마시는 것에 대한 과도한 욕망, 약물남용(알콜마약, 담배, 카페인 중독)을 불러옵니다.

둘째, 음란하거나 호색하는 정욕은 성에 대한 과도한 욕망인 간음, 간통, 근친상간, 수간, 포르노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셋째, 다투거나 시기하는 정욕은 남에게 주목받고 우위를 점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다툼과 시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들은 14절 하반절 말씀처럼 머릿속에 이러한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은 자기 삶에 분명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어제 뉴스에서도 어느 40대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것을 어린 자녀가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60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살해하고도 경찰에 체포되어 가면서도 자기가 한 행동을 반성하기닌 켜녕 오히려 잘한 행동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무정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

그렇다면 입어야 할 옷은 무엇입니까? . 본문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으려면 본문 13-14절의 말씀처럼 해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머리 속의 생각이 정욕으로 이끌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옷을 입되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낮에는 빛에 의해 자기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나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로 잡는 것,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 그래서 우리 자신을 단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정히 행한다는 것은 세가지 뜻이 있는데, 어울리게 행동하는 것과 예의를 다 하는 것과 고상하게 행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울리는 품행을 갖추어야 하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보다 더 고상한 것은 없기 때문에 생각과 품행이 항상 진리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볼 때 과거보다 더 단정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동안 잠 잔 것과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믿는 사람답다, 주님 오실 날을 기다라는 사람답다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말세를 의식하고 사는 성령의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모르고 불신 속에 잠들어 있을때는 어둠의 일을 옷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불신의 몽매함에서 깨우시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세주요 인생의 보화로 삼고 전투를 위한 갑옷을 입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은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전쟁을 치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낮의 자녀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과 같습니다. 살전 5:7-8절에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빛의 갑옷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 세상은 우리를 잘 달래어 세상 재미에 흠뻑 빠진채 잠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이러한 잠에서 깨어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옷을 입고 전투를 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TV, 광고, , , 성공, 칭찬이라는 수면제의 힘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보호자로 옷 입고, 예수님을 나의 소망으로 삼아 내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로 옷 입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최고의 보화로 옷입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옷을 입는 것이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소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오기 때문에 구원과 부활과 천국의 약속을 기억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오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입으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한 사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은 2천년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보고 회심했기 때문에 유명한 구절이 되었습니다. 방탕아 어거스틴이 성 어거스틴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본문 13,14절입니다. 그는 주후 354년 이교도 아버지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철저하게 어머니로부터 기독교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거스틴의 지적 수준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이의 질문에 답을 주려하지 않고 무조건 믿음을 강요했습니다. 여기에 회의를 느낀 어거스틴은 교회를 떠나 합리적인 답을 주는 마니교로 가서 9년 동안 그 종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다가 29세가 되어 마니교 교주 파우스트를 만나 장시간 면담을 했는데 면담 결과 마니교에 진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실망을 느껴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30세에 밀라노에 가서 그 지역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십년동안 멀리했던 성경을 다시 가져와 바울서신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2년 동안 공부하면서 말할 수 없는 갈등을 느꼈습니다. 20여년 동안 과거의 잘못된 습관에 익숙해져버린 정신상태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고 갈등하고 고민하며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밀나노의 한 정원에 앉아 있던 그가 우연히 아이들이 톨레 레게 톨레 레게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그 뜻은 들어서 읽으라는 뜻입니다. 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습니다. 그래서 급히 성경을 가져와 폈는데 오늘 본문 13-14절 말씀을 읽게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이 헌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헌옷을 벗어 버리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갈등과 번민과 고통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들고 오늘 본문 13-14절을 읽은 뒤 더 이상 읽어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확신의 빛으로 그의 마음을 비추어 그 속에 있던 모든 어둠을 물리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완전한 평온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속물 어거스틴이 성 어거스틴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어떤 옷도 아닌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밀라노 교회에서 주교로 있던 성 암부로시우스가 어느날 모니카가 집에 가지 않고 계속 울고 있으니까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모니카가 제 아들이 예수 믿으라고 했지만 끝까지 반대하므로 계속 기도하는 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주교가 여인이여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위로를 얻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약 6개월 후에 어거스틴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날로부터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데 그때가 32세였습니다. 그 이전의 모든 날들은 의미없이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종말의 시기

지금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기입니다. 죄와 고통과 죽음이 있는 이 세대와 의와 기쁨과 생명이 있는 장차 올 세대가 서로 겹쳐있습니다. 또한 흑암의 다스림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로 겹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어둠과 죄악으로 가득찬 이 종말의 때임에도 몽유병 환자, 마약중독자처럼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사는 불신자들에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며 구원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속히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는 날이 종말이 오거나 혹은 개인의 종말이 오면 그들은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들을 깊은 잠에서 깨워 속히 구원받도록 구원의 나팔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빚을 갚는 일입니다. 아직 어둠속에서 잠자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속히 알리고 구원의 빛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도록, 구원받도록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개인의 카이로스 시간이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카이로스가 내 앞에 다가왔을 때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이 나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있을 동안 우리는 어둠의 옷과 이 세상의 모든 옷을 벗고 빛의 갑옷,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 종말의 카이로스가 오면 떳떳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옛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거스틴처럼 고민하십시오. 어거스틴처럼 주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부르짖고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은혜의 빛을 잠자는 여러분의 심령에 환하게 비우처 주시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디 않는 경건한 사람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어둠의 잠에서 깨어나 역사의 종말, 개인의 종말을 준비하며 낮에처럼 단정히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우리는 자기의 사랑의 빚을 갚는 사명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도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세상사람들에게 예수 재림의 종말, 각 개인의 종말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며 속히 그 잠에서 깨어나 빛의 갑옷, 그리스도로 옷입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절박한 심정으로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성령께서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사람답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단정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세상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애타는 심정으로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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