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2025-06-08 21:22:13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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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롬12:14-21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6-08

주일오전설교 250608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본문:12: 14-21

제목: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I. 서론

우리 성도들도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10%인데 비해 대인관계에서 뛰어나면 성공할 확률이 85%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슷한 비유로 일반지능(IQ)이 사회적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확율은 20% 정도라면 감성지능(EQ)이 사회적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확률은 80% 정도라고 합니다. 즉 머리가 똑똑한 사람보다 대인관계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말입니다. 회사에서도 업무능력이 낮아서 해고당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켜 해고되는 경우가 2배나 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인간관계, 즉 대인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공적인 삶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대인관계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인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대인관계의 원리와 지침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대인관계의 원리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는 불신자들과 쉽게 교제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두가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본문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2)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본문 21절을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과 똑 같이 악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대로 똑같이 악해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성도는 불신자들이 악하게 대한다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도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려 하거나 악인과의 만남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악에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선행과 진실한 기도를 통해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회개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자신도 원수와 똑같은 죄인이며 또 우리는 의미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A라는 사람이 나를 핍박했는데 내가 진정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감정을 수용하고 그의 장점을 발견하면서 나의 잘못을 고쳐나가면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BC에게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리라 믿고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해 나가면, 시간이 걸린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할 때에 관계회복케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BC에게도 동일하게 선을 행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대인관계에서 가급적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악하게 대하더라도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두가지 대인관계 원리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2. 대인관계 지침

1) 겸손한 이웃이 되라

이 두 원리를 중심으로 실제적 행동지침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겸손한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지위, 성별, 생활 정도 등의 구분을 넘어서서 생각과 감정, 소원 등을 함께 나누고 남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상대방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잘난체 하지말고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지혜없는 자들의 생각이며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하는 우월의식을 갖고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기 쉽지만, 교만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경우에도 이웃을 위해 교만하지 말고 잘난 체하지말고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사람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수용하게 되면 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내 앞에서의 그 사람 행동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그의 좋은 행동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핍박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핍박을 가하지만 다른 누군가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원인이 상대방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상대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를 새롭게 하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함께 하는 이웃이 되라

두 번째 지침은 함께하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며 함께하는가 여부를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이 몹시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울어 줄 수 있는가, 또 이웃이 참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가를 점검해보면 내가 마음을 주는 함께하는 이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떤 이웃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이웃이라면 우리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이웃이 슬픔을 당했을 때 진정으로 슬퍼하며 위로하거나 기쁨을 만났을 때 함께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동정을 표하는 것은 기쁜 일을 만났을 때 기뻐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쉽습니다. 그런데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축하해주기가 더 어렵습니다. 인류 최초의 비극은 가인과 아벨이 제사드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형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를 기뻐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남이 잘 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웃이 누구든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상대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 핍박하는 사람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의 감정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나를 핍박한 사람은 나로부터 부인당하고 목석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그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감정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게 되고 그의 감정 속에서 그가 나를 핍박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비로소 등 돌리고 있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정말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그를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와 더불어 즐거워하고 슬퍼할 수 있는 감정의 변화가 생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감정을 수용하기 시작하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자기보다 형통하게 보이는 이웃을 볼 때 마다 질투가 생긴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

좋은 대인관계를 위해서 축복하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박해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이유없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을 괴롭히고 손해를 입히는 경우도 박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우리가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견디기 어려운 박해를 당할 때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은 사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한 박해와 고난, 특히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벧전 2:23절에 보면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박해당하실 때 결코 상대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벧전3:9절에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도록 길을 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3: 9-10절에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한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된다고 믿습니까? 10:5-6절을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무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이웃을 위해 평안을 빌 때 평안을 받을 사람이 그 집에 있으면 그 집에 복이 임하고, 평안을 받을 자격이 없으면 복을 비는 사람에게 되돌아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가 축복하면 상대방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면 대신 축복하는 사람이 그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만약 상대방에게 저주한다면 그 상대방이 저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 저주가 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그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박해자를 축복한다는 것은 그를 좋게 말하고 칭찬하고 복을 빌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박해하는 자라도 그를 칭찬하고 복을 빌어줄 때 그 박해자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4) 원수를 사랑하라

마지막으로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려면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게 호의를 베푸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9-20절에 자세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원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음주운전을 해서 내 자녀를 평생 불구자로 만들어 놓았거나 혹은 사망하게 했다면 심적으로 벌써 그 상대방이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의도적으로 나를 속여 큰 손해를 입히거나 누명을 씌워 나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과연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에도 절대 복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므로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다가 잘못하여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공정하게 원수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에게 복수를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원수 갚지 말라고 하신 또 다른 이유는 칼을 가지고 복수한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자의 귀를 칼로 쳐 그 귀를 베어버리자 26: 52절에 예수님께서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를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원수를 갚았다고 해도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게 됩니다.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어려울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면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수가 생각할 때 상대방이 자기가 한 행동과 반대로 자기에게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선의를 베풀었으니 마치 숯불을 머리에 얹어놓은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화끈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온 몸이 이 뜨거운 사랑에 감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에 녹아버린 마음에는 복수의 칼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면 그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 있으며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너무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의 위대하심은 가장 악한 것을 가장 선한 것으로 갚았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사랑의 극치는 바로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의 참된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번 까자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그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도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것은 1만 달란트 빚 진자가 주인에게 몽땅 탕감받은 것과 같습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하루 근로자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는 164천년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평생일해도 갚지 못할 이 막대한 금액을 하나님으로부터 탕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내게 아무리 죄를 지었다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불과 100데나리온 밖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100일 일하면 벌 수 있는 금액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죄용서 받은 것에 비하면 우리가 상대를 용서해주는 것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면 우리가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응답하시고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1948년에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공산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안재선이란 청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원수된 자를 손목사님은 오히려 그를 양아들로 삼아 그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은 자기 아들이 서울예고 다닐 때 그 친구들의 학교폭력으로 인해 사망하게되자 그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경영이 어려웠던 서울예고를 인수하여 명문예술고로 키우고 개교 70주년을 맞아 학교에 70억을 들여 연주홀을 건축하여 헌사했습니다. 사망한 아들 이름의 장학회를 발족하여 36년째 수많은 음악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이처럼 손양원 목사님 뿐 아니라 카톨릭 신자는 이대봉 회장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사람들과 좋은 대인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겸손하게 그들과 함께하며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고, 이웃을 축복하고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원수갚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대인관계 원리와 지침은 사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 입으면 실천이 가능하므로 이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명령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고, 불신자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면 우리는 이웃에게 마음을 주고 축복하며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성령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순종만 하면 그 능력으로 이웃과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좋은 대인관계를 만들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충만케 하셔서 좋은 대인관계 속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고 감사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일오전설교 250608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본문:12: 14-21

제목: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I. 서론

우리 성도들도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사용하는 교재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기술을 연마하는 훈련을 잘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10%인데 비해 대인관계에서 뛰어나면 성공할 확률이 85%에 이른다고 합니다. 비슷한 비유로 일반지능(IQ)이 사회적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확율은 20% 정도라면 감성지능(EQ)이 사회적 성공을 예측할 수 있는 확률은 80% 정도라고 합니다. 즉 머리가 똑똑한 사람보다 대인관계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말입니다. 회사에서도 업무능력이 낮아서 해고당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켜 해고되는 경우가 2배나 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인간관계, 즉 대인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공적인 삶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대인관계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인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대인관계의 원리와 지침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대인관계의 원리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는 불신자들과 쉽게 교제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두가지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본문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2)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본문 21절을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과 똑 같이 악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대로 똑같이 악해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성도는 불신자들이 악하게 대한다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도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려 하거나 악인과의 만남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악에게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선행과 진실한 기도를 통해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회개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자신도 원수와 똑같은 죄인이며 또 우리는 의미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A라는 사람이 나를 핍박했는데 내가 진정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감정을 수용하고 그의 장점을 발견하면서 나의 잘못을 고쳐나가면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BC에게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리라 믿고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해 나가면, 시간이 걸린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할 때에 관계회복케 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BC에게도 동일하게 선을 행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대인관계에서 가급적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악하게 대하더라도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두가지 대인관계 원리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2. 대인관계 지침

1) 겸손한 이웃이 되라

이 두 원리를 중심으로 실제적 행동지침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겸손한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지위, 성별, 생활 정도 등의 구분을 넘어서서 생각과 감정, 소원 등을 함께 나누고 남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상대방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잘난체 하지말고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지혜없는 자들의 생각이며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하는 우월의식을 갖고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겸손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기 쉽지만, 교만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경우에도 이웃을 위해 교만하지 말고 잘난 체하지말고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사람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수용하게 되면 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내 앞에서의 그 사람 행동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그의 좋은 행동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핍박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핍박을 가하지만 다른 누군가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원인이 상대방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상대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를 새롭게 하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함께 하는 이웃이 되라

두 번째 지침은 함께하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며 함께하는가 여부를 간단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이 몹시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울어 줄 수 있는가, 또 이웃이 참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가를 점검해보면 내가 마음을 주는 함께하는 이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떤 이웃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이웃이라면 우리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이웃이 슬픔을 당했을 때 진정으로 슬퍼하며 위로하거나 기쁨을 만났을 때 함께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동정을 표하는 것은 기쁜 일을 만났을 때 기뻐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쉽습니다. 그런데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축하해주기가 더 어렵습니다. 인류 최초의 비극은 가인과 아벨이 제사드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형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를 기뻐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남이 잘 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웃이 누구든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상대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 핍박하는 사람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의 감정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나를 핍박한 사람은 나로부터 부인당하고 목석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그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감정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게 되고 그의 감정 속에서 그가 나를 핍박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비로소 등 돌리고 있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정말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그를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와 더불어 즐거워하고 슬퍼할 수 있는 감정의 변화가 생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감정을 수용하기 시작하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자기보다 형통하게 보이는 이웃을 볼 때 마다 질투가 생긴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축복하는 이웃이 되라

좋은 대인관계를 위해서 축복하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박해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이유없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을 괴롭히고 손해를 입히는 경우도 박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우리가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견디기 어려운 박해를 당할 때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은 사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한 박해와 고난, 특히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벧전 2:23절에 보면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박해당하실 때 결코 상대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벧전3:9절에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도록 길을 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3: 9-10절에 보면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한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된다고 믿습니까? 10:5-6절을 보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무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이웃을 위해 평안을 빌 때 평안을 받을 사람이 그 집에 있으면 그 집에 복이 임하고, 평안을 받을 자격이 없으면 복을 비는 사람에게 되돌아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가 축복하면 상대방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면 대신 축복하는 사람이 그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만약 상대방에게 저주한다면 그 상대방이 저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 저주가 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그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박해자를 축복한다는 것은 그를 좋게 말하고 칭찬하고 복을 빌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박해하는 자라도 그를 칭찬하고 복을 빌어줄 때 그 박해자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4) 원수를 사랑하라

마지막으로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려면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게 호의를 베푸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19-20절에 자세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은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원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음주운전을 해서 내 자녀를 평생 불구자로 만들어 놓았거나 혹은 사망하게 했다면 심적으로 벌써 그 상대방이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의도적으로 나를 속여 큰 손해를 입히거나 누명을 씌워 나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과연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에도 절대 복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므로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다가 잘못하여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공정하게 원수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에게 복수를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원수 갚지 말라고 하신 또 다른 이유는 칼을 가지고 복수한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자의 귀를 칼로 쳐 그 귀를 베어버리자 26: 52절에 예수님께서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를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원수를 갚았다고 해도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게 됩니다.

 

원수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어려울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면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수가 생각할 때 상대방이 자기가 한 행동과 반대로 자기에게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선의를 베풀었으니 마치 숯불을 머리에 얹어놓은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화끈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온 몸이 이 뜨거운 사랑에 감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에 녹아버린 마음에는 복수의 칼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면 그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 있으며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너무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의 위대하심은 가장 악한 것을 가장 선한 것으로 갚았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못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사랑의 극치는 바로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의 참된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번 까자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그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도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것은 1만 달란트 빚 진자가 주인에게 몽땅 탕감받은 것과 같습니다.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하루 근로자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는 164천년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평생일해도 갚지 못할 이 막대한 금액을 하나님으로부터 탕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내게 아무리 죄를 지었다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불과 100데나리온 밖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100일 일하면 벌 수 있는 금액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죄용서 받은 것에 비하면 우리가 상대를 용서해주는 것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면 우리가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응답하시고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1948년에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공산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안재선이란 청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원수된 자를 손목사님은 오히려 그를 양아들로 삼아 그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은 자기 아들이 서울예고 다닐 때 그 친구들의 학교폭력으로 인해 사망하게되자 그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경영이 어려웠던 서울예고를 인수하여 명문예술고로 키우고 개교 70주년을 맞아 학교에 70억을 들여 연주홀을 건축하여 헌사했습니다. 사망한 아들 이름의 장학회를 발족하여 36년째 수많은 음악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이처럼 손양원 목사님 뿐 아니라 카톨릭 신자는 이대봉 회장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사람들과 좋은 대인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겸손하게 그들과 함께하며 마음을 주는 이웃이 되고, 이웃을 축복하고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원수갚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대인관계 원리와 지침은 사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 입으면 실천이 가능하므로 이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명령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고, 불신자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면 우리는 이웃에게 마음을 주고 축복하며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성령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순종만 하면 그 능력으로 이웃과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좋은 대인관계를 만들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충만케 하셔서 좋은 대인관계 속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고 감사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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