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요21:1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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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5-28 |
수요설교 25052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본문 :요21: 15-25
제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I. 서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항구로 들어오는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던졌더니 그물 가득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맞아 준비하고 있던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아침밥을 먹은 후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특히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아뱌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는데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II. 본론
1. 베드로를 치유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영적 치유, 목양사역 임명, 그리고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언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영적 치유와 회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묻습니다. 본문 15절에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사람들 보다’라는 말은 베드로를 제외한 여섯명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원어로는 이 단어를 ‘이것들 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갈리릴 바닷가에 메어 놓은 고깃배, 신선한 생선과 그 주변의 것들을 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물건 중 어느 것이 주님께서 진짜 의도하신 내용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나 물건들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6-17절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두 번이나 더하고 베드로도 동일한 대답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새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13: 33절에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하시면서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는데 그때 베드로는 37절에서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를 만나자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아뱌의 심문을 받을 때 예수 제자라는 신분이 탄로가 나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자기 혼자 살기 위해서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도 여러 날 통곡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육이 지칠대로 지쳐 고향 갈릴리 바닷가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친히 이곳까지 찾아오셔서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선명한 손을 내밀며 ”배가 고플 테니 어서 와서 먹으라“라고 하시며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고개를 떨군 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조금씩 사그라지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숯불을 볼 때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대제사장 뜰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주님을 모른다“라고 부인했던 그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질문을 받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울었을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 베드로는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모두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그를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예수님 만나기 전 자기 본명인 ‘시몬’이라는 옛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공식적인 호명 방식은 항상 ‘누구의 아들 누구’로 부릅니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문답할 때 세 번 모두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그렇게 부인한 것은 나의 제자 베드로가 아니라 나를 만나기 전 너의 원래 옛 모습인 시몬이었을 거야,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자신 만만하게 소리치던 너의 옛 자아가 나를 부인한 거야”라는 것을 그에게 깨우쳐 주고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것은 베드로의 과거 잘못을 추궁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시몬아 너는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슴 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그의 영혼에 남아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불씨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부끄럽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랑의 대답을 세 번 반복하면서 베드로의 마음은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치유하고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남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자신이 얼마나 치유되었는지 증명해 보였습니다. 사도행전과 베드로후서를 보면 모든 실패와 상처들을 완전히 씻음을 받고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던 그 모습 대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 군중들 앞에서 행4:12절 말씀처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베드로를 넘어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 영적으로 치유하고 사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회복시켰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2. 베드로를 목양 사역자로 부르심
둘째는 베드로의 목양사역을 위해 세 번이나 질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똑같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이유는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근심하여’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슬퍼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는 이 세 번째 질문에 마음이 더욱 찔리고 슬펐습니다. 예수님이 재판 받는 곳에 따라갔다가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요13:37절에서 자신은 예수를 떠나지 않고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공언했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루 저녁에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제야 예수님이 왜 세 번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서 수제자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는데, 이제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시인하게 함으로써 그의 위신을 세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이라 공언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자신을 예수님이 다시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위신을 높여주셔서 다시 사역하게 하신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깨닫는 것이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한 사람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할 때 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베드로를 목양사역자 즉, 목회자로 임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임직식 때처럼 베드로를 호명을 하고 난 후에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명령: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임직 선포: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목사 임직식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 목사 임직식의 모델을 베드로의 임직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사 임직의 조건은 한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 등 다른 단어로 나오지만 사실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를 써서 한 말입니다. 양을 먹이라는 말은 목양하라는 것인데 목회자의 사명을 주시고 임직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 양을 먹이고 기르고 살리는 것과 관계없는 것은 목양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일찍 제자로,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이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로서 주님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전도하는 전도자의 사역과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치듯이 돌보고 먹이며 인도하는 목양사역도 겸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을 모두 양으로 보고 베드로에게 그 양들을 목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회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성도들을 넘어뜨리고자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목회란 이와같은 마귀의 유혹에서 양떼들이 끌려가지 않도록 돌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인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만 자기 양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생명을 살리는 가장 소중한 일이고,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인의 양들을 사랑하고 돌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비로소 주님은 자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목양의 사명을 받고 나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사도요한은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21절에 예수님에게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22-23절에서 “그의 사명은 그의 사명이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명을 무시해도 안되지만 부러워해서도 안됩니다. 각자 주님께서 맡기신 고유한 은사와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오직 베드로 한 사람이 받은 사명이라고 오해하여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부르고 그 후계자를 지금까지 교황으로 선출하여 그 사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베드로가 목양사명을 받은 것은 제자들의 대표로 베드로가 받은 것 뿐입니다. 세계복음화의 전도명령과 새신자 양육 사명은 모든 성도들이 받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도 모든 성도들이 받은 사명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베드로의 순교
셋째, 예수님은 베드로가 영광스런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세 번이나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했을 때 본문 18절에 보면 베드로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예언하셨습니다. 본문 18절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 요한은 이 말씀이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장차 순교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지금 젊은 베드로는 자신이 입은 옷의 허리 끈을 마음대로 조일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당해서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젊었을 때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던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받은 이후 부터 그는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양들을 위해, 힘을 다해 남은 몇십년의 여생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으로 순교하게 되자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못박혀 죽겠습니까? 나를 거꾸로 매달아주십시오”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백발을 휘날리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본문 18절의 예수님 말씀대로 생애 마지막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그가 십자가를 질 수 있었을까요?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베드로처럼 순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장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을 쓴 사도요한은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아서 밧모섬에 유배를 갔으나 거기서 재림하실 주님과 세상 끝날과 장차 우리가 갈 천국에 대해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성도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각자 주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영광스런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 요한복음의 기록목적
요한복음을 이제 결론지을 시간입니다. 요한복음 전체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려고 했습니다. 요1:1절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증거로 예수님이 행한 많은 기적 중에 일곱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또한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존경해야 할 대상일 뿐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만 만나면 우리의 삶에 엄청난 변화와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 24절에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사람은 바로 사도요한입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자기라는 말을 겸손하게 간접적으로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이므로 그 증거는 참된 증거라고 강조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 만큼 더 확실하고 참된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것만 기록했느냐고 묻는다면, 사도요한은 본문 25절에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사건뿐 아니라 그분의 심정, 그분이 하신 말씀의 뜻을 기록하려면 온 세상을 다 채워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요20: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내용을 기록할 수 있지만 이렇게 요약해서 쓴 목적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구원 얻도록 하는데 있다고 그 기록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에는 부족합니다. 예수 안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분은 무한하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합니까? 그분의 승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영원합니까? 요한은 이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같은 은혜를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받으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가 주변사람들이 예수 제자라고 하자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겁이 나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강하게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세 번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를 꾸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주님게서는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셔서 그에게 새로운 목양사역을 부탁하셨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위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며, 내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성도는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을 듣고 교회로 온 새가족들을 돌보며 양육하여 주님을 닮은 또 다른 제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주님의 품 안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살리고 먹이고 살찌우는 목양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목양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의 사랑에 빚진자로서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수요설교 25052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본문 :요21: 15-25
제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I. 서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항구로 들어오는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던졌더니 그물 가득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맞아 준비하고 있던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아침밥을 먹은 후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특히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아뱌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는데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II. 본론
1. 베드로를 치유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의 영적 치유, 목양사역 임명, 그리고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언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영적 치유와 회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묻습니다. 본문 15절에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사람들 보다’라는 말은 베드로를 제외한 여섯명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원어로는 이 단어를 ‘이것들 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갈리릴 바닷가에 메어 놓은 고깃배, 신선한 생선과 그 주변의 것들을 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물건 중 어느 것이 주님께서 진짜 의도하신 내용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이나 물건들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6-17절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질문을 두 번이나 더하고 베드로도 동일한 대답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새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13: 33절에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하시면서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는데 그때 베드로는 37절에서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를 만나자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아뱌의 심문을 받을 때 예수 제자라는 신분이 탄로가 나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자기 혼자 살기 위해서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도 여러 날 통곡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육이 지칠대로 지쳐 고향 갈릴리 바닷가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친히 이곳까지 찾아오셔서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선명한 손을 내밀며 ”배가 고플 테니 어서 와서 먹으라“라고 하시며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주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고개를 떨군 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조금씩 사그라지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숯불을 볼 때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대제사장 뜰에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주님을 모른다“라고 부인했던 그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질문을 받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울었을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 베드로는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모두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그를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예수님 만나기 전 자기 본명인 ‘시몬’이라는 옛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공식적인 호명 방식은 항상 ‘누구의 아들 누구’로 부릅니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문답할 때 세 번 모두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그렇게 부인한 것은 나의 제자 베드로가 아니라 나를 만나기 전 너의 원래 옛 모습인 시몬이었을 거야, 너는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자신 만만하게 소리치던 너의 옛 자아가 나를 부인한 거야”라는 것을 그에게 깨우쳐 주고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것은 베드로의 과거 잘못을 추궁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시몬아 너는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슴 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그의 영혼에 남아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불씨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부끄럽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랑의 대답을 세 번 반복하면서 베드로의 마음은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치유하고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남은 자신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자신이 얼마나 치유되었는지 증명해 보였습니다. 사도행전과 베드로후서를 보면 모든 실패와 상처들을 완전히 씻음을 받고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던 그 모습 대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 군중들 앞에서 행4:12절 말씀처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베드로를 넘어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 영적으로 치유하고 사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회복시켰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2. 베드로를 목양 사역자로 부르심
둘째는 베드로의 목양사역을 위해 세 번이나 질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똑같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이유는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근심하여’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슬퍼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는 이 세 번째 질문에 마음이 더욱 찔리고 슬펐습니다. 예수님이 재판 받는 곳에 따라갔다가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요13:37절에서 자신은 예수를 떠나지 않고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공언했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루 저녁에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제야 예수님이 왜 세 번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서 수제자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는데, 이제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시인하게 함으로써 그의 위신을 세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이라 공언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자신을 예수님이 다시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위신을 높여주셔서 다시 사역하게 하신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깨닫는 것이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한 사람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할 때 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베드로를 목양사역자 즉, 목회자로 임직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임직식 때처럼 베드로를 호명을 하고 난 후에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명령: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임직 선포: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목사 임직식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 목사 임직식의 모델을 베드로의 임직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목사 임직의 조건은 한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 등 다른 단어로 나오지만 사실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를 써서 한 말입니다. 양을 먹이라는 말은 목양하라는 것인데 목회자의 사명을 주시고 임직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 양을 먹이고 기르고 살리는 것과 관계없는 것은 목양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일찍 제자로,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이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로서 주님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전도하는 전도자의 사역과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치듯이 돌보고 먹이며 인도하는 목양사역도 겸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을 모두 양으로 보고 베드로에게 그 양들을 목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회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성도들을 넘어뜨리고자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목회란 이와같은 마귀의 유혹에서 양떼들이 끌려가지 않도록 돌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인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만 자기 양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생명을 살리는 가장 소중한 일이고,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인의 양들을 사랑하고 돌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비로소 주님은 자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목양의 사명을 받고 나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사도요한은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21절에 예수님에게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22-23절에서 “그의 사명은 그의 사명이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명을 무시해도 안되지만 부러워해서도 안됩니다. 각자 주님께서 맡기신 고유한 은사와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오직 베드로 한 사람이 받은 사명이라고 오해하여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부르고 그 후계자를 지금까지 교황으로 선출하여 그 사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베드로가 목양사명을 받은 것은 제자들의 대표로 베드로가 받은 것 뿐입니다. 세계복음화의 전도명령과 새신자 양육 사명은 모든 성도들이 받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도 모든 성도들이 받은 사명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베드로의 순교
셋째, 예수님은 베드로가 영광스런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세 번이나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고백했을 때 본문 18절에 보면 베드로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예언하셨습니다. 본문 18절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 요한은 이 말씀이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장차 순교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지금 젊은 베드로는 자신이 입은 옷의 허리 끈을 마음대로 조일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당해서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젊었을 때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던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받은 이후 부터 그는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양들을 위해, 힘을 다해 남은 몇십년의 여생을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으로 순교하게 되자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못박혀 죽겠습니까? 나를 거꾸로 매달아주십시오”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백발을 휘날리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본문 18절의 예수님 말씀대로 생애 마지막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그가 십자가를 질 수 있었을까요?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베드로처럼 순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장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을 쓴 사도요한은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아서 밧모섬에 유배를 갔으나 거기서 재림하실 주님과 세상 끝날과 장차 우리가 갈 천국에 대해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성도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각자 주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영광스런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 요한복음의 기록목적
요한복음을 이제 결론지을 시간입니다. 요한복음 전체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려고 했습니다. 요1:1절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증거로 예수님이 행한 많은 기적 중에 일곱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또한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존경해야 할 대상일 뿐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만 만나면 우리의 삶에 엄청난 변화와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 24절에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사람은 바로 사도요한입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자기라는 말을 겸손하게 간접적으로 돌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이므로 그 증거는 참된 증거라고 강조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 만큼 더 확실하고 참된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것만 기록했느냐고 묻는다면, 사도요한은 본문 25절에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사건뿐 아니라 그분의 심정, 그분이 하신 말씀의 뜻을 기록하려면 온 세상을 다 채워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요20: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내용을 기록할 수 있지만 이렇게 요약해서 쓴 목적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구원 얻도록 하는데 있다고 그 기록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기에는 부족합니다. 예수 안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분은 무한하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합니까? 그분의 승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영원합니까? 요한은 이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같은 은혜를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받으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갔다가 주변사람들이 예수 제자라고 하자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겁이 나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강하게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세 번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를 꾸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주님게서는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셔서 그에게 새로운 목양사역을 부탁하셨습니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위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며, 내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성도는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을 듣고 교회로 온 새가족들을 돌보며 양육하여 주님을 닮은 또 다른 제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주님의 품 안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살리고 먹이고 살찌우는 목양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목양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의 사랑에 빚진자로서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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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21:15-25 | 2025-05-28 | 홍기칠 목사 |
58 | 필요를 채워주시는 부활의 주님 | 요21:1-14 | 2025-05-21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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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20250319 수요설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16-33) | |||
49 | 20250312 수요설교 (성령께서 하시는 일/요16: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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