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2025-07-24 09:14:56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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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갈3:6-14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7-23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23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본문: 3: 6-14

제목: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I. 서론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갈2:16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성령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의 자손이 된 성도들에게 어떤 상속이 주어지는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음

본문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복을 주십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12:3절 하반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 인간의 역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75세 때인데 그 후 수십년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한 자식이 없었고 하갈이란 여종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5에 가면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 상속자가 아니고 사라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15: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15: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언약이 수십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자신과 아내 사라가 늙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자식을 출산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의 후손을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100, 사라가 9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12장의 언약이 25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된 것입니다.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을 처음으로 불러내셨던 75세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수십년이 지난 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는데 비해서, 율법은 창15장 사건이 있은 후 약 400년이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 후 20년 뒤에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이나 할례 이전에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갈라디아에 나타난 거짓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의롭다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율법이나 할례를 행하여 자격, 조건, 행위를 갖춰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계보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믿을 때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은 우리를 더욱 한걸음 나아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이방과 열방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12장부터 이미 이방인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3:28-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고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자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39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은 갈3: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5:6절에 보았던 것처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우리들은 육신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3: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들, 즉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상속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의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첫째, 칭의의 유업입니다. 본문 9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칭의를 포함합니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이나 앞으로 잘못할 일들까지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으며,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기초가 됩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자녀는 영생의 상속자로 인치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영생의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3:1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된 표시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씨를 심고,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썩어질 것과 죽음과 지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씨를 심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의존한다면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두려움을 없애 줍니다.

3. 잘못된 율법주의 구원관의 위험

갈리디아서는 우리가 잘못된 구원의 확신에 빠질 끊임없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신앙적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출석하고, 식사 시간에 기도하고, 중대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즉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의 구분은 교회 다니는 성도와 불신자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한 그룹은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성도들과 다른 한 그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폄하하는 성도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0-14절이 전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들으려면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고후13:5절에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율법주의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율법행위라고 했습니다. 율법행위는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의존적인 순종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율법행위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여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자기 의존적인 노력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저주는 여러분이 율법의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 행위들을 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믿음을 보완하려는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율법은 모세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왜곡시킨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선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지 않았고, 겸손과 기쁨과 믿음에 의한 사랑이 없는 자들, 종종 교회에 들어와 교리를 옹호하고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율법 자체에서 비롯된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나는 혹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선한 행위를 가지고 공로를 쌓아 하나님 앞에 남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끝없이 하나님의 완전과 거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율법을 완전히 다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율법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언했습니다. 3:23절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 원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도우심을 경험할 때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끝없이 정죄와 심판 아래 머물게 됩니다. 본문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정죄와 심판과 저주와 사망 아래 있는 인생들 속에 하나님께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2절에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산다는 말씀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끔직한 최후입니까?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율법주의적인 율법 준수에 전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애쓰는 다른 유대주의자들처럼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을 얻고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곤란했던 주제가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21:3절의 말씀입니다.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았다는 상징인데 어떻게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온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 저주를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다는 뜻입니다. 노예나 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속량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 아래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했던 온 인류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행위를 의지하여 정죄 아래 떨어지는 법이 없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후5:21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은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율법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자기 의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되었던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이 성령 안에서 집약되었다는 것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는 욕구를 버리고 의와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는데 육체로 끝을 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인함입니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율법주의적인 노력과 삶의 태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대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는 그 유업인 칭의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와 성령을 받으면 죽음과 지옥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로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주어지는 유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내가 과연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있는지 세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믿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는 갈2:20절 바울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가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영적 싸움은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행위냐의 싸움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주의적 행위가 되지 않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의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날마다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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