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2025-07-17 16:46:24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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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갈3:1-5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7-16

수요설교 250716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본문: 3:1-5

제목: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I. 서론

2:16절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천국백성 삼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서 그 분을 마음껏 누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귀한 공로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

갈라디아 1, 2장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일을 더하여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례, 음식규례, 절기와 성일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적어도 그런 행위들이 갈라디아인들의 칭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신봉하는 교파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과 노력이 더해져야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에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칼빈주의적 성경관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주장은 비록 진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사도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복음이며 결코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들의 어리석고 일관성 없는 행동을 오늘 본문에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모순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본문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 눈 앞에서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벌써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눈 앞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복음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감동적으로 생생하게 눈으로 본 것처럼 주의 복음을 받고 행복해 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한데 너희가 어찌 그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이 하나 밖에 없는 참 진리를 떠나 율법의 행위를 첨가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한탄하며 반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과 3절에서 두 번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사실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에 마치 홀린 것처럼 복음을 버리고 어리석게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어리석은 이유 두가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대속이 얼마나 충분한지 보여줍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를 따르고 율법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며 그것으로 우리의 의지나 노력의 힘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세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이 성도들의 삶 속에 계시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의 관계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8: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는 것을 항상 포함합니다. 2:20절에서 처럼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성도들을 사셨고, 성령께서 성도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질문인 성령께서 계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는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입니다. 병고침과 귀신추방, 기도를 통한 환경변화와 같은 강력한 역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아버지시며 그들이 그분의 자녀라는 강한 확신이 그 증거입니다. 4: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 양자의 영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답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 아이처럼 무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그 말씀은 믿음을 낳았으며 반항하던 자아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은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왜 그들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는 그들이 시작했던 그대로 똑같이 계속 나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완전한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더한다면 그것은 비진리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수많은 신령한 복을 믿음에 근거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 모든 복을 거부하고 무언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공로를 더 쌓겠다고 열심일 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3. 성령이냐 육체냐?

2절과 3절 사이에 용어가 달라진 것을 주목하십시오, 2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듣고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육체로 마치려 하는 것으로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리학적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주장을 소중히 여기는 옛 자아를 가리킵니다.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자기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려는 자아이기 때문에 개인적 자기결정의 힘을 신봉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자기결정 성향과 복종하지 않는 정신은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에게 자기 행위로 성장하도록 부추키는 기독교 성장철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은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시작한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위협한 이단의 본질은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후의 성장은 행위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이단의 한 형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철학에 기반하면 믿음이 있어야 할 곳에 행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은혜를 폐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성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성화되기 위하여 무엇에 의존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은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위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삶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전 인격,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실제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2:32-33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 모든 성도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행2:38-39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뿐아니라 지금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다. 어떤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육신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심을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엡1: 13-14절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그 증거를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육신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공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합니다. 성령이 동행하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성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 삶이 성령의 도움과 동행하심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이 신앙생활을 육체를 의지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길로 가려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왜 굳이 육체의 길로 가려고 합니까? 처음에 그들은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나서 기대만큼 변화가 신속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보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뭔가 믿음이나 은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심히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온전해지라고 부추키니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남아 있는 죄성인 자기 중심성과 자기보호 본능,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더 준수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과 은혜로 충분치 않고, 행위를 더 해야 한다고 유혹할 때 우리는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이나 복을 받을 조건을 갖출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를 달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공로를 쌓는 길로 달려갑니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딘 것 같지만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신앙의 복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4. 성령으로 사는 방법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0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영원히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면서 15:5절 하반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속에 사랑이 넘치도록, 은혜가 넘치도록,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셋째, 오직 주님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제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며 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힘이 되심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오는 행동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마무리할 때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선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묵상하면서 하루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중에 감사한 일 세가지를 노트에 기록해 보며 감사기도를 드린다면 그 감사가 점점 차고 넘치리라 믿습니다. 유기성 목사님 교회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쓴다고 합니다. 동행일기가 바로 감사 일기가 아니겠습니까?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책망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자기중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약의 말씀을 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한 결과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앞에 매일 감사의 일기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16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본문: 3:1-5

제목: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I. 서론

2:16절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천국백성 삼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서 그 분을 마음껏 누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귀한 공로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

갈라디아 1, 2장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일을 더하여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례, 음식규례, 절기와 성일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적어도 그런 행위들이 갈라디아인들의 칭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신봉하는 교파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과 노력이 더해져야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에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칼빈주의적 성경관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주장은 비록 진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사도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복음이며 결코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들의 어리석고 일관성 없는 행동을 오늘 본문에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모순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본문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 눈 앞에서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벌써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눈 앞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복음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감동적으로 생생하게 눈으로 본 것처럼 주의 복음을 받고 행복해 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한데 너희가 어찌 그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이 하나 밖에 없는 참 진리를 떠나 율법의 행위를 첨가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한탄하며 반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과 3절에서 두 번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사실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에 마치 홀린 것처럼 복음을 버리고 어리석게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어리석은 이유 두가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대속이 얼마나 충분한지 보여줍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를 따르고 율법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며 그것으로 우리의 의지나 노력의 힘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세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이 성도들의 삶 속에 계시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의 관계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8: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는 것을 항상 포함합니다. 2:20절에서 처럼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성도들을 사셨고, 성령께서 성도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질문인 성령께서 계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는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입니다. 병고침과 귀신추방, 기도를 통한 환경변화와 같은 강력한 역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아버지시며 그들이 그분의 자녀라는 강한 확신이 그 증거입니다. 4: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 양자의 영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답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 아이처럼 무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그 말씀은 믿음을 낳았으며 반항하던 자아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은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왜 그들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는 그들이 시작했던 그대로 똑같이 계속 나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완전한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더한다면 그것은 비진리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수많은 신령한 복을 믿음에 근거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 모든 복을 거부하고 무언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공로를 더 쌓겠다고 열심일 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3. 성령이냐 육체냐?

2절과 3절 사이에 용어가 달라진 것을 주목하십시오, 2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듣고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육체로 마치려 하는 것으로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리학적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주장을 소중히 여기는 옛 자아를 가리킵니다.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자기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려는 자아이기 때문에 개인적 자기결정의 힘을 신봉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자기결정 성향과 복종하지 않는 정신은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에게 자기 행위로 성장하도록 부추키는 기독교 성장철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은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시작한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위협한 이단의 본질은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후의 성장은 행위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이단의 한 형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철학에 기반하면 믿음이 있어야 할 곳에 행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은혜를 폐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성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성화되기 위하여 무엇에 의존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은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위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삶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전 인격,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실제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2:32-33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 모든 성도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행2:38-39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뿐아니라 지금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다. 어떤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육신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심을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엡1: 13-14절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그 증거를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육신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공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합니다. 성령이 동행하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성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 삶이 성령의 도움과 동행하심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이 신앙생활을 육체를 의지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길로 가려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왜 굳이 육체의 길로 가려고 합니까? 처음에 그들은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나서 기대만큼 변화가 신속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보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뭔가 믿음이나 은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심히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온전해지라고 부추키니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남아 있는 죄성인 자기 중심성과 자기보호 본능,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더 준수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과 은혜로 충분치 않고, 행위를 더 해야 한다고 유혹할 때 우리는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이나 복을 받을 조건을 갖출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를 달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공로를 쌓는 길로 달려갑니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딘 것 같지만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신앙의 복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4. 성령으로 사는 방법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0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영원히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면서 15:5절 하반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속에 사랑이 넘치도록, 은혜가 넘치도록,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셋째, 오직 주님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제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며 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힘이 되심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오는 행동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마무리할 때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선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묵상하면서 하루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중에 감사한 일 세가지를 노트에 기록해 보며 감사기도를 드린다면 그 감사가 점점 차고 넘치리라 믿습니다. 유기성 목사님 교회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쓴다고 합니다. 동행일기가 바로 감사 일기가 아니겠습니까?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책망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자기중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약의 말씀을 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한 결과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앞에 매일 감사의 일기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16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본문: 3:1-5

제목: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I. 서론

2:16절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천국백성 삼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서 그 분을 마음껏 누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귀한 공로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

갈라디아 1, 2장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일을 더하여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례, 음식규례, 절기와 성일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적어도 그런 행위들이 갈라디아인들의 칭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신봉하는 교파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과 노력이 더해져야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에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칼빈주의적 성경관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주장은 비록 진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사도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복음이며 결코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들의 어리석고 일관성 없는 행동을 오늘 본문에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모순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본문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 눈 앞에서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벌써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눈 앞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복음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감동적으로 생생하게 눈으로 본 것처럼 주의 복음을 받고 행복해 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한데 너희가 어찌 그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이 하나 밖에 없는 참 진리를 떠나 율법의 행위를 첨가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한탄하며 반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과 3절에서 두 번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사실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에 마치 홀린 것처럼 복음을 버리고 어리석게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어리석은 이유 두가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대속이 얼마나 충분한지 보여줍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를 따르고 율법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며 그것으로 우리의 의지나 노력의 힘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세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이 성도들의 삶 속에 계시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의 관계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8: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는 것을 항상 포함합니다. 2:20절에서 처럼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성도들을 사셨고, 성령께서 성도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질문인 성령께서 계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는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입니다. 병고침과 귀신추방, 기도를 통한 환경변화와 같은 강력한 역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아버지시며 그들이 그분의 자녀라는 강한 확신이 그 증거입니다. 4: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 양자의 영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답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 아이처럼 무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그 말씀은 믿음을 낳았으며 반항하던 자아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은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왜 그들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는 그들이 시작했던 그대로 똑같이 계속 나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완전한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더한다면 그것은 비진리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수많은 신령한 복을 믿음에 근거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 모든 복을 거부하고 무언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공로를 더 쌓겠다고 열심일 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3. 성령이냐 육체냐?

2절과 3절 사이에 용어가 달라진 것을 주목하십시오, 2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듣고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육체로 마치려 하는 것으로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리학적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주장을 소중히 여기는 옛 자아를 가리킵니다.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자기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려는 자아이기 때문에 개인적 자기결정의 힘을 신봉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자기결정 성향과 복종하지 않는 정신은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에게 자기 행위로 성장하도록 부추키는 기독교 성장철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은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시작한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위협한 이단의 본질은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후의 성장은 행위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이단의 한 형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철학에 기반하면 믿음이 있어야 할 곳에 행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은혜를 폐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성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성화되기 위하여 무엇에 의존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은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위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삶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전 인격,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실제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2:32-33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 모든 성도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행2:38-39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뿐아니라 지금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다. 어떤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육신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심을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엡1: 13-14절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그 증거를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육신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공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합니다. 성령이 동행하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성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 삶이 성령의 도움과 동행하심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이 신앙생활을 육체를 의지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길로 가려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왜 굳이 육체의 길로 가려고 합니까? 처음에 그들은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나서 기대만큼 변화가 신속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보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뭔가 믿음이나 은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심히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온전해지라고 부추키니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남아 있는 죄성인 자기 중심성과 자기보호 본능,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더 준수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과 은혜로 충분치 않고, 행위를 더 해야 한다고 유혹할 때 우리는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이나 복을 받을 조건을 갖출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를 달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공로를 쌓는 길로 달려갑니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딘 것 같지만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신앙의 복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4. 성령으로 사는 방법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0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영원히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면서 15:5절 하반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속에 사랑이 넘치도록, 은혜가 넘치도록,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셋째, 오직 주님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제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며 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힘이 되심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오는 행동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마무리할 때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선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묵상하면서 하루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중에 감사한 일 세가지를 노트에 기록해 보며 감사기도를 드린다면 그 감사가 점점 차고 넘치리라 믿습니다. 유기성 목사님 교회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쓴다고 합니다. 동행일기가 바로 감사 일기가 아니겠습니까?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책망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자기중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약의 말씀을 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한 결과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앞에 매일 감사의 일기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16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본문: 3:1-5

제목: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I. 서론

2:16절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천국백성 삼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서 그 분을 마음껏 누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귀한 공로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

갈라디아 1, 2장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일을 더하여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례, 음식규례, 절기와 성일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적어도 그런 행위들이 갈라디아인들의 칭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신봉하는 교파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과 노력이 더해져야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에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칼빈주의적 성경관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주장은 비록 진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사도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복음이며 결코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들의 어리석고 일관성 없는 행동을 오늘 본문에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모순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본문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 눈 앞에서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벌써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눈 앞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복음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감동적으로 생생하게 눈으로 본 것처럼 주의 복음을 받고 행복해 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한데 너희가 어찌 그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이 하나 밖에 없는 참 진리를 떠나 율법의 행위를 첨가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한탄하며 반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과 3절에서 두 번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사실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에 마치 홀린 것처럼 복음을 버리고 어리석게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어리석은 이유 두가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대속이 얼마나 충분한지 보여줍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를 따르고 율법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며 그것으로 우리의 의지나 노력의 힘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세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이 성도들의 삶 속에 계시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의 관계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8: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는 것을 항상 포함합니다. 2:20절에서 처럼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성도들을 사셨고, 성령께서 성도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질문인 성령께서 계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는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입니다. 병고침과 귀신추방, 기도를 통한 환경변화와 같은 강력한 역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아버지시며 그들이 그분의 자녀라는 강한 확신이 그 증거입니다. 4: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 양자의 영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답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 아이처럼 무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그 말씀은 믿음을 낳았으며 반항하던 자아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은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왜 그들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는 그들이 시작했던 그대로 똑같이 계속 나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완전한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더한다면 그것은 비진리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수많은 신령한 복을 믿음에 근거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 모든 복을 거부하고 무언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공로를 더 쌓겠다고 열심일 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3. 성령이냐 육체냐?

2절과 3절 사이에 용어가 달라진 것을 주목하십시오, 2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듣고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육체로 마치려 하는 것으로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리학적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주장을 소중히 여기는 옛 자아를 가리킵니다.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자기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려는 자아이기 때문에 개인적 자기결정의 힘을 신봉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자기결정 성향과 복종하지 않는 정신은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에게 자기 행위로 성장하도록 부추키는 기독교 성장철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은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시작한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위협한 이단의 본질은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후의 성장은 행위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이단의 한 형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철학에 기반하면 믿음이 있어야 할 곳에 행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은혜를 폐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성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성화되기 위하여 무엇에 의존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은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위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삶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전 인격,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실제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2:32-33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 모든 성도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행2:38-39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뿐아니라 지금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다. 어떤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육신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심을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엡1: 13-14절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그 증거를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육신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공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합니다. 성령이 동행하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성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 삶이 성령의 도움과 동행하심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이 신앙생활을 육체를 의지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길로 가려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왜 굳이 육체의 길로 가려고 합니까? 처음에 그들은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나서 기대만큼 변화가 신속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보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뭔가 믿음이나 은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심히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온전해지라고 부추키니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남아 있는 죄성인 자기 중심성과 자기보호 본능,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더 준수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과 은혜로 충분치 않고, 행위를 더 해야 한다고 유혹할 때 우리는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이나 복을 받을 조건을 갖출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를 달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공로를 쌓는 길로 달려갑니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딘 것 같지만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신앙의 복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4. 성령으로 사는 방법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0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영원히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면서 15:5절 하반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속에 사랑이 넘치도록, 은혜가 넘치도록,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셋째, 오직 주님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제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며 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힘이 되심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오는 행동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마무리할 때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선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묵상하면서 하루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중에 감사한 일 세가지를 노트에 기록해 보며 감사기도를 드린다면 그 감사가 점점 차고 넘치리라 믿습니다. 유기성 목사님 교회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쓴다고 합니다. 동행일기가 바로 감사 일기가 아니겠습니까?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책망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자기중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약의 말씀을 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한 결과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앞에 매일 감사의 일기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16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본문: 3:1-5

제목: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I. 서론

2:16절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천국백성 삼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서 그 분을 마음껏 누리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귀한 공로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

갈라디아 1, 2장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일을 더하여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례, 음식규례, 절기와 성일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적어도 그런 행위들이 갈라디아인들의 칭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신봉하는 교파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행과 노력이 더해져야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회에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칼빈주의적 성경관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이며,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주장은 비록 진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사도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복음이며 결코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그들의 어리석고 일관성 없는 행동을 오늘 본문에서 지적합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모순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과도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본문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 눈 앞에서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벌써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눈 앞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복음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감동적으로 생생하게 눈으로 본 것처럼 주의 복음을 받고 행복해 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한데 너희가 어찌 그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이 하나 밖에 없는 참 진리를 떠나 율법의 행위를 첨가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한탄하며 반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과 3절에서 두 번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은 사실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에 마치 홀린 것처럼 복음을 버리고 어리석게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행동이 어리석은 이유 두가지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대속이 얼마나 충분한지 보여줍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를 따르고 율법을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며 그것으로 우리의 의지나 노력의 힘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본문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세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성령이 성도들의 삶 속에 계시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의 관계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8: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역사하는 것을 항상 포함합니다. 2:20절에서 처럼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로 성도들을 사셨고, 성령께서 성도들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질문인 성령께서 계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는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이 계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들입니다. 병고침과 귀신추방, 기도를 통한 환경변화와 같은 강력한 역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아버지시며 그들이 그분의 자녀라는 강한 확신이 그 증거입니다. 4:6절에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그들 안에 양자의 영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성령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답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교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 아이처럼 무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그 말씀은 믿음을 낳았으며 반항하던 자아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은 갈라디아인들의 행위가 왜 그들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3절에는 그들이 시작했던 그대로 똑같이 계속 나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했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완전한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더한다면 그것은 비진리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수많은 신령한 복을 믿음에 근거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 모든 복을 거부하고 무언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위한 공로를 더 쌓겠다고 열심일 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3. 성령이냐 육체냐?

2절과 3절 사이에 용어가 달라진 것을 주목하십시오, 2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듣고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육체로 마치려 하는 것으로 대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리학적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과 자기주장을 소중히 여기는 옛 자아를 가리킵니다. 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자기 스스로 자기 주인이 되려는 자아이기 때문에 개인적 자기결정의 힘을 신봉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자기결정 성향과 복종하지 않는 정신은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에게 자기 행위로 성장하도록 부추키는 기독교 성장철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은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앙생활을 시작한 갈라이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위협한 이단의 본질은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후의 성장은 행위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구원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것입니다. 현대적 이단의 한 형태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철학에 기반하면 믿음이 있어야 할 곳에 행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도덕성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은혜를 폐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성화되었느냐가 아니라 성화되기 위하여 무엇에 의존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은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위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려 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삶에서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힘과 노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전 인격,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실제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2:32-33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사도 베드로가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 모든 성도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행2:38-39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약속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뿐아니라 지금도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입술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다. 어떤 실체와 내용이 생깁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육신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심을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또한 엡1: 13-14절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그 증거를 주십니다. 성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육신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자기를 신뢰하고 공로를 세우고, 끊임없이 자격을 얻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책망합니다. 성령이 동행하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성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 삶이 성령의 도움과 동행하심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이 신앙생활을 육체를 의지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길로 가려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왜 굳이 육체의 길로 가려고 합니까? 처음에 그들은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나서 기대만큼 변화가 신속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순간마다 자기 자신을 보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뭔가 믿음이나 은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심히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의심이 생깁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온전해지라고 부추키니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남아 있는 죄성인 자기 중심성과 자기보호 본능,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법을 더 준수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과 은혜로 충분치 않고, 행위를 더 해야 한다고 유혹할 때 우리는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이나 복을 받을 조건을 갖출 힘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예수를 달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공로를 쌓는 길로 달려갑니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딘 것 같지만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신앙의 복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4. 성령으로 사는 방법

그렇다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20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영원히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하시면서 15:5절 하반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 속에 사랑이 넘치도록, 은혜가 넘치도록,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납니다.

 

셋째, 오직 주님만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제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며 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위는 율법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힘이 되심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오는 행동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마무리할 때 각자의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선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묵상하면서 하루동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중에 감사한 일 세가지를 노트에 기록해 보며 감사기도를 드린다면 그 감사가 점점 차고 넘치리라 믿습니다. 유기성 목사님 교회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쓴다고 합니다. 동행일기가 바로 감사 일기가 아니겠습니까?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책망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자기중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언약의 말씀을 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한 결과를 돌이켜 보며 하나님 앞에 매일 감사의 일기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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