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2: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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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7-09 |
수요설교 250709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본문: 갈2: 16-21
제목: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I. 서론
지난 주 수요예배에서 갈2: 11-16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들이 오자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 그 자리를 떠났던 외식행위에 대해 바울사도가 책망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오늘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풍성한 구원의 의미
우리는 예수를 믿어 얻는 결과를 ‘구원을 받는다’라고 표현하거나 ‘죄용서를 받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16절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용서’가 작은 개념이라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더 큰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서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상태로 서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는 옳다, 의인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성도의 삶에 임하는 모든 부요와 풍성함을 모두 합한 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종종 잊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 신분, 명예, 지위, 업적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개인적 종말을 맞아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지옥멸망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보고 절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때 까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가지게 됩니다. 파스칼이 그의 대표작 팡세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공허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으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채워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마음의 공허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음성을 듣을 수 있기 때문에 참된 자유와 평강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처럼 어리석고 내세울 것이 없는 실패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너는 참되다, 옳다, 의롭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보편적인 종교와 철학의 본질은 사람이 각각 자신의 행위와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게 세우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인류역사 만큼 오래된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본문 16절 하반절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모두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구원받고 나서도, 하나님 앞에 무언가 예쁜 짓을 해서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이유는 행위로는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을 충족시킬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율법이라는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지 깨닫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감사하며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자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죄를 자복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진리에 의탁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심장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본문 17절에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 17절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지들이 바울에게 ”당신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도록 부추기고 있군요.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죄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17절처럼 대답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형제자매와 함께 먹기 위해 유대인들이 정한 음식규례를 무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유대인 규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런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선행이나 율법을 무시하고 방탕하고 죄악된 삶을 살도록 부추키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합니다. 즉 행위, 조건, 자격에 근거하지 않고 무조건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관계없다는 오해를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중심이 어떠하든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격하여 참된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선행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방탕한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고 믿으면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더 이상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완전한 의의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습관이 우리 육체에 남아있고, 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한순간에 180도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아가는데, 살아가면서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해가며 점점 성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처음 들었들 때 보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복음이 더욱 사실이고 참되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3. 바울이 헐었던 율법주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하게 해주시는 것이 우리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닌 이유를 18절에서 설명합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헐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결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헐었던 것은 모세가 가르쳤던 율법이 아니라 바리새인들 다수가 만들어 사용했던 율법을 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을 순종으로 이끌기 위한 철로로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철로길을 따라 사람을 이끌어 가는 기관차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관차와 객차인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구원은 은혜로, 믿음으로 주어지고, 순종의 길, 성화의 길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철로를 수직으로 들어 올려 하늘 문에 기대어 놓으려 했습니다. 그것을 위로 올라가는 사다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천국에 들어가는 도덕적 자격을 입증하는 긴 목록으로 만든 것입니다. 철로가 사다리가 되면 모든 가로대 하나라도 없으면 다음 단계에 오르지 못합니다. 바울이 허문 것은 이 사다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천국에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고 그것으로 구원받을 도덕적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의 율법적 노력을 신뢰하는 대신 그분을 신뢰하도록 이끄실 때, 그분은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은혜의 철로가 아니라 행위의 사다리로 만든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는 범법행위입니다.
본문 19절은 18절을 뒷받침합니다.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면,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분명히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19절은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자는 하나님과 더 멀어집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오랜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려면 율법주의를 버리고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산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려는 옛 자아는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롬7장에서는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롬7:1-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여성이 능력, 사회적 지위, 재능의 탁월함에 관계없이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더 이상 남편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자유롭습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생이 율법을 율법답게 제대로 지켜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명령과 요구를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전부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율법을 어긴 우리의 삶에 대한 정죄와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더 이상 남김없이 다 이루셨고 율법을 어긴 결과로 오는 형벌과 심판도 예수님께서 전부 우리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율법은 더 이상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분의 귀한 공로로 우리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요구하거나 명령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와 명령은 우리와 더 이상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으면 율법이 정죄합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이 소리를 칩니다. 그럴때는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서면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다시 율법의 정죄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속에 실제적인 일이 일어나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죄 아래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4. 율법에 대해 죽은 후에 삶
본문 20절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은 나의 극악무도한 본성을 공갲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형은 로마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자를 처형하는 처형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황제가 예수님을 그런 범죄자로 취급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내 자신을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죽음이 정말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믿을 때, 도덕과 지성과 용기의 사다리를 오르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천국에 올라가려고 한 나의 교만한 옛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존과 확신은 십자가 밑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나의 극악무도한 자아와 더불어 그것을 숨기고 나의 능력으로 구원받겠다고 잘난체 하고 교만했던 옛 자아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20절은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나의 교만한 삶과 자기중심적 삶이 사라진 그 나의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뻣뻣하던 교만의 목이 꺾였으며, 돌 같은 마음이 깨어졌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주관하시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직 내 안에 사시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 결과 율법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그리고 죄를 향해서도 죽고, 이 세상을 향해서도 죽었습니다. 모두 과거형 동사이므로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자기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멈추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고 싶어지고 예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이웃을 더욱 먼저 섬기고, 자기를 희생하여 타인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본분이고 영광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세상을 살고 이웃을 복되게 하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둘째, 본문 20절은 그것을 또 다르게 표현합니다.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는 더 이상 자신을 믿거나 자기 주도하에 살거나 자기를 높이려는 ’나‘가 아닙니다. 이 새로운 ’나‘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하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입증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나는 옛날의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보호와 인도와 기쁨과 평안과 의와 생명을 얻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비밀입니까?
고후 5:17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의롭다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의 모태에서 어린 아이로 태어는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에도 분명히 다른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외적으로는 표가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성령안에서 각 개인이 예수와 연합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첫 번째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영적 연합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일들은 우리 안에서 동등하게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와 연합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어 우리가 함께 십자가에 참여하고 부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충분히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2천년 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예수와 함께 죽고 율법에 대해 죽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순간 천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이 땅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직 이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몸안에 죄에 익숙한 습관이 있기 때문에 몸이 원하는대로 따라가면 망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나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일5:4절에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닐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의 본성과 세상의 메시지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가르치는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는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범법 행위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사다리를 허무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를 죄짓게 하는 자로 만든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죄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어리석은 자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고 담대히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기를 꾸미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조건을 구비하는 세상의 행위가 아니라, 의롭다함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가 참된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사람에게 합당한 참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길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행동을 하는 백성으로 성숙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니는 대로 살지말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질그릇 같고, 티끌같고, 먼지 같아 깨어지고 흩어지기 쉬운 우리지만 우리 몸에 성령이 내주하시니 성삼위 하나님이 빚어내시는 영광이 어떤 것인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세상이 우리를 통해 참된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게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가 되었으니 오직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이 놀라운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살리는 사명자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수요설교 250709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본문: 갈2: 16-21
제목: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I. 서론
지난 주 수요예배에서 갈2: 11-16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들이 오자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 그 자리를 떠났던 외식행위에 대해 바울사도가 책망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오늘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풍성한 구원의 의미
우리는 예수를 믿어 얻는 결과를 ‘구원을 받는다’라고 표현하거나 ‘죄용서를 받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16절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용서’가 작은 개념이라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더 큰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서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상태로 서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는 옳다, 의인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성도의 삶에 임하는 모든 부요와 풍성함을 모두 합한 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적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종종 잊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 신분, 명예, 지위, 업적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개인적 종말을 맞아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지옥멸망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보고 절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때 까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가지게 됩니다. 파스칼이 그의 대표작 팡세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공허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으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채워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마음의 공허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음성을 듣을 수 있기 때문에 참된 자유와 평강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처럼 어리석고 내세울 것이 없는 실패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너는 참되다, 옳다, 의롭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보편적인 종교와 철학의 본질은 사람이 각각 자신의 행위와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게 세우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인류역사 만큼 오래된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본문 16절 하반절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모두 다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구원받고 나서도, 하나님 앞에 무언가 예쁜 짓을 해서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이유는 행위로는 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을 충족시킬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율법이라는 거울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지 깨닫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감사하며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자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죄를 자복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진리에 의탁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요 복음의 심장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본문 17절에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 17절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지들이 바울에게 ”당신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도록 부추기고 있군요.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죄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17절처럼 대답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형제자매와 함께 먹기 위해 유대인들이 정한 음식규례를 무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유대인 규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런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예수님이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결과적으로 선행이나 율법을 무시하고 방탕하고 죄악된 삶을 살도록 부추키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합니다. 즉 행위, 조건, 자격에 근거하지 않고 무조건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관계없다는 오해를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중심이 어떠하든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고 믿는다면 그때부터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격하여 참된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선행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방탕한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고 믿으면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더 이상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완전한 의의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습관이 우리 육체에 남아있고, 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한순간에 180도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아가는데, 살아가면서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해가며 점점 성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처음 들었들 때 보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복음이 더욱 사실이고 참되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3. 바울이 헐었던 율법주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행위에서 자유하게 해주시는 것이 우리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닌 이유를 18절에서 설명합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헐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결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헐었던 것은 모세가 가르쳤던 율법이 아니라 바리새인들 다수가 만들어 사용했던 율법을 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을 순종으로 이끌기 위한 철로로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철로길을 따라 사람을 이끌어 가는 기관차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관차와 객차인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구원은 은혜로, 믿음으로 주어지고, 순종의 길, 성화의 길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철로를 수직으로 들어 올려 하늘 문에 기대어 놓으려 했습니다. 그것을 위로 올라가는 사다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천국에 들어가는 도덕적 자격을 입증하는 긴 목록으로 만든 것입니다. 철로가 사다리가 되면 모든 가로대 하나라도 없으면 다음 단계에 오르지 못합니다. 바울이 허문 것은 이 사다리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천국에 올라가는 사다리로 세우고 그것으로 구원받을 도덕적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8절에서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의 율법적 노력을 신뢰하는 대신 그분을 신뢰하도록 이끄실 때, 그분은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은혜의 철로가 아니라 행위의 사다리로 만든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는 범법행위입니다.
본문 19절은 18절을 뒷받침합니다.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면, 율법을 다시 세우는 것은 분명히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19절은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자는 하나님과 더 멀어집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오랜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려면 율법주의를 버리고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산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려는 옛 자아는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롬7장에서는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롬7:1-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여성이 능력, 사회적 지위, 재능의 탁월함에 관계없이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더 이상 남편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자유롭습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생이 율법을 율법답게 제대로 지켜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명령과 요구를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전부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율법을 어긴 우리의 삶에 대한 정죄와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더 이상 남김없이 다 이루셨고 율법을 어긴 결과로 오는 형벌과 심판도 예수님께서 전부 우리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율법은 더 이상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분의 귀한 공로로 우리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요구하거나 명령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와 명령은 우리와 더 이상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죄에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으면 율법이 정죄합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이 소리를 칩니다. 그럴때는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서면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다시 율법의 정죄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속에 실제적인 일이 일어나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죄 아래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4. 율법에 대해 죽은 후에 삶
본문 20절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은 나의 극악무도한 본성을 공갲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형은 로마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자를 처형하는 처형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황제가 예수님을 그런 범죄자로 취급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내 자신을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죽음이 정말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믿을 때, 도덕과 지성과 용기의 사다리를 오르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천국에 올라가려고 한 나의 교만한 옛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존과 확신은 십자가 밑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나의 극악무도한 자아와 더불어 그것을 숨기고 나의 능력으로 구원받겠다고 잘난체 하고 교만했던 옛 자아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습니까? 20절은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나의 교만한 삶과 자기중심적 삶이 사라진 그 나의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뻣뻣하던 교만의 목이 꺾였으며, 돌 같은 마음이 깨어졌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주관하시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직 내 안에 사시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 결과 율법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그리고 죄를 향해서도 죽고, 이 세상을 향해서도 죽었습니다. 모두 과거형 동사이므로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가 자기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멈추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하고 싶어지고 예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이웃을 더욱 먼저 섬기고, 자기를 희생하여 타인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본분이고 영광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세상을 살고 이웃을 복되게 하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둘째, 본문 20절은 그것을 또 다르게 표현합니다.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는 더 이상 자신을 믿거나 자기 주도하에 살거나 자기를 높이려는 ’나‘가 아닙니다. 이 새로운 ’나‘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하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입증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나는 옛날의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보호와 인도와 기쁨과 평안과 의와 생명을 얻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비밀입니까?
고후 5:17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의롭다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의 모태에서 어린 아이로 태어는 것처럼 영적으로 태어나는 순간에도 분명히 다른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외적으로는 표가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성령안에서 각 개인이 예수와 연합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첫 번째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영적 연합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일들은 우리 안에서 동등하게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와 연합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어 우리가 함께 십자가에 참여하고 부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충분히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2천년 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예수와 함께 죽고 율법에 대해 죽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순간 천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이 땅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직 이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몸안에 죄에 익숙한 습관이 있기 때문에 몸이 원하는대로 따라가면 망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믿고 나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일5:4절에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닐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의 본성과 세상의 메시지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가르치는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는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범법 행위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사다리를 허무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를 죄짓게 하는 자로 만든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죄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어리석은 자로 만든 것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고 담대히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기를 꾸미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조건을 구비하는 세상의 행위가 아니라, 의롭다함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가 참된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사람에게 합당한 참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길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행동을 하는 백성으로 성숙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니는 대로 살지말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질그릇 같고, 티끌같고, 먼지 같아 깨어지고 흩어지기 쉬운 우리지만 우리 몸에 성령이 내주하시니 성삼위 하나님이 빚어내시는 영광이 어떤 것인지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세상이 우리를 통해 참된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게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가 되었으니 오직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이 놀라운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살리는 사명자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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