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6: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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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10-01 |
수요설교 251001 짐을 서로 지라
본문: 갈6:1-10
제목: 짐을 서로 지라
I. 서론
지난 주에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비교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도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위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서로 짐을 지고 가르침을 받는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권고인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짐을 서로 지라
본문 1절에 “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 삶의 기계에서 고장 난 부품입니다. 그것은 고쳐져야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망가진 것을 발견하면, 그 사람이 다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하고 경건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성도는 그를 도와야 합니다. 여기서 온유한 심령이란 성령이 충만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온유한 마음으로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형제를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으로 회복되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실족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의로운 자는 남이 죄짓는 것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용서하고 죄로 인해 고장 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잘못된 태도와 습관에 대해 그 고장 난 부분을 고칠 수 있는 위대한 정비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권고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볼 때 그냥 그 사람이 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함께 짐을 나누어 집니다. 한편 내가 짐을 지다가 너무 힘들면 다른 성도의 도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짐을 서로 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이란 율법이나 계명이 아니라 사랑을 기초로 한 예수님의 교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께 절대 신뢰하고 복종할 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즉 사랑으로 형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돌보며 서로 짐을 나누어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자랐다, 성령인도 받는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롬15:1절에 “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믿음이 약한 성도의 약점을 감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내가 감당합니다. 짐을 져 주고 절대로 다른 사람의 약한 것과 비교하여 나를 자랑하는 교만을 부리지 않습니다. 갈5: 13절에서도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종이 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사랑이 만들어 낸 종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노릇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주인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종이 짐을 지듯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들을 볼 때에 그 짐을 함께 나눠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허물과 실패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지만,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도움과 인도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짐을 나눠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이 분하여 그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가인은 “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지니이까?”라고 항변합니다. 마침 어제 국민일보에서 강영안 한동대 석좌교수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칼럼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가인이 한 말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자기 책임을 부인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답 속에 우리는 “ 나는 타인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혹은 내가 외면한 타인의 고통은 과연 나와 무관한가?”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여길 때 시기와 질투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 존재를 부인당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 가인의 상처는 칼날이 되어 자신의 경쟁자인 아벨을 향한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타인이 받는 인정과 성공, 행복은 때때로 나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져 순식간에 인간관계를 경쟁과 위계 구조로 바꿉니다. 흔히 하는 말로 타인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라는 생각입니다.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변합니다. 교회에서 조차 성도간에 서로 비난하는 이유는 경쟁 속에서 서로를 “지킬 수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변명을 묵인하지 않고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억울한 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외침은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가인에게 묻는 질문에 우리는 “ 예, 저는 제 형제 자매와 이웃을 지키고 보살펴야 할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 대답은 말로만 그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단지 예배하고 기도하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 외면 당한 자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요 짐을 서로 지는 자 입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를 지은 형제를 대면하여 권면할 때 먼저 우리가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수준 높은 성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성도들의 성령충만한 상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인도를 받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중에서 온유함이 중요합니다. 본문 1절에서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자를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바로 잡을 때 교만을 피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유한 심령으로 권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 즉 성령인도를 받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으로 형제를 권고하되 그가 치유능력을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치유능력이 없는 자신에게 시선을 주목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드러날 때 두가지 잘못된 반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었던 사람들에게 죄를 발견하면 실망하고 분노하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면에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기 자랑과 교만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허물을 지나치게 비판하게 됩니다. 다시 재기하지 못하도록 비난하고 비판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까지 전부 몰살시킵니다.
언어와 감정에도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비효과란 기상학에서 “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 태풍이 일어 날 수 있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개념이 인문학이나 신학에 적용되어 “ 사소해 보이는 변화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큰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사용하는 비난의 언어나 부정적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불안과 혐오와 증오를 가져 올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폭력과 살인행위 까지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비난의 말과 부정적인 감정이 형제와 부모와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례가 방송과 신문에 연일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좋은 언어와 사랑의 감정은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을 베드로가 칼로 귀를 자르자 그를 꾸짖으며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꾸짖으시며 십자가의 증오를 사랑으로 받아내셔서 온 세상에 “사랑의 나비효과”를 확산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은 “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교만의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지 못하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거나 무거운 짐을 진 자를 도와준 다음에 자신의 의를 자랑하거나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과시하고 스스로 우월감에 젖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의 예는 죄가 드러나면 그냥 덮어주고 지나가려 하는 태도입니다. 죄가 밝혀질 때 생겨나는 많은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두려워 무조건 덮고 지나가려 합니다. “죄 짓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나?“라고 하면서 무마하려고 합니다. 이 또한 바람직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1절에서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죄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권면하고 바르게 징계해야 합니다. 징계를 하되 죄 때문에 넘어져 있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죄라고 말하고 바로 잡고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공동체를 수많은 불미스러운 일들로부터 보호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본문 4-5절은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은 자신이 성취한 일의 가치를 평가할 때 다른 사람들의 일을 평가기준으로 삼지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나보다 더 타락했다고 해서 내가 우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은 우리가 서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짓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교만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는 5절 말씀은 4절을 근거로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실패한 형제자매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죄의 짐을 가볍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판날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되면 각자의 자신의 죄짐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교만을 부추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살피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역할과 부르심과 은사에 내가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는지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부름과 은사를 존중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충성하고 있는지 날마다 살펴보며 자신을 갱신해야 합니다.
2.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본문 6절은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2절에서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의 또 다른 예를 말하고 있는데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나 선교사의 재정적인 짐을 서로 지라는 것입니다. 즉 목회자가 자유롭게 기도하고 말씀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그 원리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실 때 먹을 것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일꾼은 그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 5:17-18에서 “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해서 목회자가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성도들이 마음을 다해 목회자를 격려하고 지원해주고 경제적인 짐을 져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목회자를 통하여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역을 후원하기 위해 헌금할 때 성도는 가르치는 자의 짐을 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7절은 6절 말씀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돈을 내는 자들은 구약의 율법주의자처럼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육체의 욕구만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경멸을 받을 때 하나님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육체로 심고 영생을 거두려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됩니다. 잠깐 동안은 자신을 속일 수 있어도 심은 대로 거두는 날이 오면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돈을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그것은 마치 눈사태처럼 그 머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구약 왕하 5:25-27절을 보면 엘리사는 그의 종 게하시에게 “너가 돈 때문에 나아만을 따라가지 않았느냐 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높이는 것 보다 금으로 네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더 욕심을 내느냐? 보라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들에게 영원히 미치리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너의 탐욕이 바로 네 머리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 나의 안락함 대신 전도와 선교사역을 후원하는 일에 사용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본문 8절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없이 세상의 유익과 쾌락만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육체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고 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간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즉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후원하기 위해 자신의 재정을 선용하면 그는 성령에 뿌리는 사람이 되고 이로써 영적 성장을 촉진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느끼며 말씀과 기도로 성령충만을 구합니까? 아니면 성령충만 구할 시간이 없게 느껴지고 오늘은 평범한 날이기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집니까? 월급을 받을 때 어떻게 하면 이 돈을 하나님 나라에 가장 유익하게 사용할지 성령님께 구합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고 육체의 밭에 투자합니까?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곳을 알아보고, 그곳에 자신이 가진 자원의 씨앗을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약속하신 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은 곧 자신의 물질로 목회자와 교사와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포기 하지 않으면 때가 되었을 때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본문 9절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는 일”인데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선한 일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10절에는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할 기회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사람들보다 먼저 가까운 곳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개 행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핍박 아래 놓여 있어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구제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일단 믿는 형제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이웃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지원하고 베풀어야 합니다. 선한 일도 기회가 있을 때, 내가 능력이 있을 때 행해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도들은 혹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범하는 형제가 있다면 먼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가 믿음생활을 다시 회복하도록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권고하고 그의 부족한 부분의 짐을 나누어 짐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자신도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성찰해 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도우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우월감을 드러내며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각자 자기의 짐, 즉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행할 일은 각자 책임을 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가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성도는 그를 귀하게 여기고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목회자를 통해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원을 소홀히 하고 목회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위해 선한 일을 지속할 뿐 아니라 나아가 모든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을 할 때에 때가 되면 성령의 열매와 영생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형제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지원하고 돕는 선한 일을 지속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영원한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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