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새 인류
2025-11-21 11:42:24
홍기칠
조회수   38
설교본문 엡2:11-22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11-19

수요설교 251119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새 인류

본문: 2:11-22

제목: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새 인류

 

I. 서론

지난 수요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신 것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증거하기 위함이요, 예수 안에서 선한 일 즉, 전도와 선교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방인이요 언약 밖에 있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새사람이 되고 유대인 성도들과 하나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게 됩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새창조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의 상태(11-12)

본문 11절에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2:1-10절 전체의 내용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었으며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셔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들어 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연합에 대한 분명한 선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 그리고 노아의 대홍수 이후 인간의 분열과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시고, 그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열방에 빛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의 소명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자기들만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마음속으로 개들이라고 멸시하고 혐오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은 지옥불의 연료로 쓰려고 창조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고 그 사이의 장벽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은 건물 자체가 더 높은 단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제사장의 뜰이 있었고, 그 동쪽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이 있었고, 더 동쪽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세가지 뜰은 성전과 같은 높이에 있었습니다. 이 높이에서 다섯계단을 내려오면 벽으로 둘러 쌓인 연단이 있었고, 그 너머에 벽으로 가로막힌 바깥뜰인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곳에서 성전을 바라볼 수는 있었으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벽은 1.5m 높이의 돌로 된 벽으로 차단되어 있었고 그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헬라어와 라틴어로 침입자는 처형된다라는 무서운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그 누구도 이 성소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것이 엡2장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지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소외보다 더 심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이었습니다. 이같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근본적인 인간관계가 붕괴된 것은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1-12절에서 이처럼 소외된 이방인이였던 에베소교회 성도들과 우리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본문 1-3절에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11-12절에서는 특히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의 소외현상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특권적 표지를 자랑하고 이방인들은 무할례자들이라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손으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형식적인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받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바울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11,12절에서 그 때에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 때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이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을 가리킵니다. 본문 12절에서 이방인들의 형편을 5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설명했는데 이방인들은 예수님이오시전 전에 오실 메시아를 기다릴 수 없고 기대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대부분 이방인으로 있다가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 시민들로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특권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이 축복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즉 택한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방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셨고 이삭과 야곱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은혜의 언약은 하나지만 그 후손들에게 여러 번 재확인 해 주셨기 때문에 약속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는 자신이 그들의 특별한 하나님임을 계시해주지 않았습니다.

넷째, 이방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썩어질 이 세상 외에는 다른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그들을 구원하기로 약속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스스로 기운을 차릴 만한 소망이 없는 절망적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온 인류에게 계시해 주셨지만 이방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시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인간 마음의 갈망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들은 무신론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5중으로 하나님과는 매우 먼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핸드릭센은 이러한 이방인들의 모습을 그리스도도 없고, 나라도 없고, 친구도 없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다고 묘사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소외된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했고, 하나님을 싫어했으며, 사람들 사이에도 인종, 계급, 계층, 지역, 문화의 장벽을 쌓고 서로 미워하며 분쟁과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화평이 되신 그리스도(13-18)

본문 13절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 안에서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것과 그로 인해 우리를 하나님과 인간 간에 화목하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목을 받아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멀리 있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성도들과 가까워진 것은 우선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 때문이고, 개인적 회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현재적 경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댓가를 지불하셨는가를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었고 화평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에게 화평을 주실 뿐 아니라 화평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화평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4절 말씀처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셨기때문입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적대적 관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는 사실은 화평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위대함을 증거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화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담을 허셨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주후 70년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까지는 그 성전 벽이 허물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이방인들을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그 벽이 남아 있었다해도 영적으로는 주후 30년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이미 파괴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5절 말씀처럼 우리의 화평을 위해 그리스도는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그런데 15절에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5: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씀과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하셨고, 10:4절에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씀은 율법 전체의 요구를 성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의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은 도덕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법조문으로 된 계명들입니다. 예컨대 할례, 제사, 음식규정, 의식상의 정결과 부정에 대한 규칙 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들로 이방인들에 대해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의식 규례 전체를 파기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유형의 구약 의식제도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동의 기준이 되는 도덕법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덕법은 예수 믿은 후에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로서는 그 도덕적 행위를 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것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에서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하셨으며, 죽음을 통해 우리의 불순종의 결과에 책임을 지시고 그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의식법 규정이나 도덕법의 정죄 두가지 모두 십자가에서 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의식법이나 도덕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의식법을 폐하시고 도덕적 율법을 완전히 실천하셨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성취가 우리의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완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제사의식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제사의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폐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이제 새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첫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성된 새 인류가 된 것을 뜻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율법으로 인해반목하고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제해 버리자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인류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둘을 하나의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화평케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케 하셨고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생긴 새로운 연합은 새사람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기 안에서 창조되고 연합된 새 인류인 것입니다. 그래서 3:11절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되었던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였고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을 이방인들로부터 갈라놓고 있던 분열의 도구인 율법을 폐하시고, 이전에 깊이 분열되었던 두 인류를 화평하게 하사 그들로부터 새로운 한 인류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롭게 연합된 인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17-18절을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 있었던 이방인과 가까이 있었던 유대인들을 동등하게 대해 주시고 평안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17절에 오셔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기보다 성령으로 오심을 가리킵니다. 그가 성령으로 오셔서 평안의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그의 백성을 중생케 하시고, 인치시고, 내주하시며,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고, 우리가 연약할 때 도우시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3.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교회(19-22)

바울은 지금까지 언급한 사실을 근거로 이제부터라는 말로 결론을 소개합니다. 본문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소외되어 국적도 없고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이었지만 이제는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고, 새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의 신정국가 대신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국제공동체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여러 인종이 다 함께 모여 하나가 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의 어떤 나라보다 멋지고 더 영속적인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입니다.

 

본문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이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12제자들과 바울, 야고보, 그리고 다른 한 두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특수집단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을 교회가 믿고 보존하고 순종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선지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전해 준 영감받은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모두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은 그들의 교훈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의미로 볼 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은 바로 신약말씀이며 교회는 이 신약말씀 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로서의 신약성경은 완성되고 종료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 말씀의 터 위에서 세우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모퉁이 돌은 건물의 구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말합니다. 이 모퉁이 돌이 없으면 건물이 존재할 수 없으며 건물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퉁이 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이 그리스도의 존재와 능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 건물이 세워지려면 모퉁이 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이 튼튼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각자가 영적으로 튼튼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튼튼하게 지어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본문 21,22절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는 뜻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장해 간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모임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자동적으로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할 처소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에 의해 그분의 성전인 그의 백성 안에 거하십니다. 새성전은 물리적 건물이나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 영적인 하나님의 집이며 온 인류를 포함할 수 있는 무형의 우주적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외와 적대감과 불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 폐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사랑하시는 새로운 사회인 교회공동체를 이룩하셨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 밖에, 이스라엘 밖에,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으며 하나님 없이 소망없는 세상에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없어지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우주적 교회의 한 일원이 되어 이 화평의 복음,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내 가족, 내 형제, 내 이웃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시킨 인종주의, 민족주의, 지방색, 성직자주의, 오만, 질투, 편견 등의 새로운 담을 세워 화평의 복음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팎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아직도 이웃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차별과 분열을 그대로 둔 채 세상을 향해 평화와 화목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 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믿음으로 하나되어 주님께서 십자가 피로 이루신 화평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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