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2025-08-10 20:56:18
홍기칠
조회수   13
설교본문 갈3:23-29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8-06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806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본문:3:23-29

제목: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I. 서론

지난 주에 갈3: 15-25절까지 율법과 약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둘 다 귀한 선물인데 그것을 왜곡해서 사용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18:18-22절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부자 관리가 와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이웃사랑에 해당하는 5-10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하니까 그런 것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부자가 십계명의 형식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그 십계명의 핵심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합리화 해서 형식적인 율법만 지키려고 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주셨던 그 양심이 마음속에서 소리를 친다면 아무도 그 양심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본질을 놓치고 양심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마비된 양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어떤 유업이 따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의 기능

본문 23-24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메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오기 전이란 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은 사람을 죄의 감옥으로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율법을 읽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이고 무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으로 가두어두지 않으면 자기 본능에 따라 행하는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과 양심 안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유대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7: 19절에 보면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면서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바울조차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초등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숙한 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규제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유업을 줄 수 없었습니다. 4:2절에 따르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올 때까지 율법이 이스라엘을 규제 아래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믿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규제 아래 묶어 두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없다면, 율법이 엄격한 훈육교사가 주는 부담스러운 행위지침서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무거운 직무설명서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믿음과 결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다면, 율법은 현명한 의사의 처방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2. 그리스도로 옷 입기

본문 25절에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다 성취하시고 마침표를 찍으신 후에, 자신을 믿는 자는 그 율법의 의를 다 이룬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아무도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사에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대가 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람들을 죄 아래에 가두어 두는 반면에 복음은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나타나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주권적이고 효과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기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거듭나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와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요1:12절 말씀처럼 이 예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할 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나는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공식적인 표시가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제복에 따라 그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있듯이 로마시대에는 노예교사의 가르침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 성인식을 하게 됩니다. 성인식을 할 때는 옷을 바꿔 입습니다. 더 이상 어린시절의 옷이 아니라 성년에 합당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고 정식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을 받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인 초등교사를 떠나 성인식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 옷 입은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된 후에도 죄를 좋아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면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예수로 옷 입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행위와 공로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을 때 그 옷이 나타내는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입은 성인식 이후에 성인대접을 받는 것 처럼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일 중요한 영광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옷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옷 입으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더 이상 세상 기준의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는데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주인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됩니다. 그런 신분의 노예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와서 오늘 본문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채 100년도 되기 전에 초대교회에서 이런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진 것은 그 노예 성도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이었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입는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신분은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주인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는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된 모습으로 기뻐하며, 그 육신의 주인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 맡은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됩니다. 그 주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노예들의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장이신 함재봉 박사가 강의하는 한국인의 탄생이란 유투브 영상을 보면 1880년대에서 1990년대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인 알렌과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전한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 봉건사회를 근대화 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서민, 남자와 여자, 상전과 노비 등 차별이 엄격해서 종과 여자들은 아예 이름도 없었고, 서민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한글사용이 400여년간 전혀 되지 않았기에 서민들은 글을 읽을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문맹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들이 의사로서 서양의학을 들여와 왕실주치의를 하면서도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이화학당과 배제학당을 세워 서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 중에 여성은 졸업장에 쓸 이름이 없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서민 중 40%가 노비였기에 그들도 성이나 이름이 없었습니다. 전 백성이 성과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주민등록을 하도록 하면서 성과 이름을 모두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말에 여성이 이름이 없으니 예컨대 김화란은 영어 헬렌의 한국식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이 한문만 숭상하고 사용하면서 언문이라고 업신여겼던 한글을 다시 발굴하고 체계화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게 되니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서민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워 조선 최초로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장로를 선출하고 장로가 목사를 청빙하는 칼빈이 개발한 장로교회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세례받기 전에 주일성수, 도박, 음주 금지, 부모효도,일부일처 등을 서약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초기에 복음을 받은 백정들이 교회에 나오자 양반들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따로 교회를 분립했는데, 교회가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백정들이 있는 교회로 와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 복음이 전파됨으로 조선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전부 편견, 편애, 차별, 우열, 편견, 특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재력과 외모와 학력과 직업과 성별, 출신지역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인간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든 성도는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냥 모였다가 헤어지는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이 차별하고 찢어놓은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다양성을 가지고도 서로가 몸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지체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유업을 이을 자

본문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요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 약속한 유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는 자, 곧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28절처럼 인종, 지위, 성별 등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5: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율법의 사다리가 넘어져서 이제는 즐겁게 순종하며 가는 수평적인 철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과 죄와 사망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특별객차 안에서 하나님의 여행 일정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천국을 유업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속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시고 동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닮은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구원의 기쁨을 얻었으니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복음의 빛을 비추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제목 설교본문 설교일 설교자
69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갈4:1-11 2025-08-13 홍기칠 목사
68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갈3:23-29 2025-08-06 홍기칠 목사
67 율법과 약속 갈3:15-25 2025-07-30 홍기칠 목사
66 믿음으로 된 아브라함의 자손 갈3:6-14 2025-07-23 홍기칠 목사
65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1-5 2025-07-16 홍기칠 목사
64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갈2:16-21 2025-07-09 홍기칠 목사
63 믿음으로 의롭게 됨 갈2:11-16 2025-07-02 홍기칠 목사
62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사도직과 복음 갈1:11-24 2025-06-18 홍기칠 목사
61 복음의 유일성 갈1:6-10 2025-06-11 홍기칠 목사
60 그리스도의 복음 갈1:1-5 2025-06-04 홍기칠 목사
5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25 2025-05-28 홍기칠 목사
58 필요를 채워주시는 부활의 주님 요21:1-14 2025-05-21 홍기칠 목사
57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요20:19-31 2025-05-14 홍기칠 목사
56 숨은 제자 요19:31-42 2025-05-07 홍기칠 목사
55 다 이루었다 요19:17-30 2025-04-30 홍기칠 목사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