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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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8-13 |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813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본문: 갈4:1-11
제목: 새로운 신분을 누리라
I.서론
지난 주 갈3: 22-29절 말씀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는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하나님의 자녀된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가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하나님 아들로서의 신분과 특권
본문 1,2절에 “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 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12세, 헬라인은 16-18세가 되면 성년식을 하게 됩니다. 성년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옷을 망또와 같은 성인 옷으로 갈아입고 완전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14세까지는 아버지가 정한 후견인과 관리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유업을 이을 아들도 종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분 자체는 주인이고 아들이지만 실제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지도와 통제 아래 있기 때문에 종과 똑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린아이 상태인 것입니다. 후견인은 어린 아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고, 청지기는 재산과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서 “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이방인 성도와 유대인 성도를 모두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율법 아래 매어 미숙하고 자유가 없이 속박된 상태에서 살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전에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괴롭히던 유치한 종교적 교리나 의식, 세상의 초보적 지식에 매어 종노릇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는 현대인들도 실제적으로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욕망과 욕심의 종이되고, 죽음과 이 세상의 종이고, 죄와 자신의 종이 되는 것이 사람들의 영적 실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종노릇 하던 것이 끝납니다. 온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본문 4절에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 인간 구원을 위해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에 의해 세상을 정복하여 평화를 이룩하고 모든 나라로 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헬라어 하나만을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며, 각 나라마다 로마총독을 파송하여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 유일신과 메시아 시대의 대망사상을 선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죄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 올 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으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은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것을 통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시고 그 저주의 댓가를 다 치루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로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기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난지 33일만에 성전에 올라가 결례를 행하는 등 율법의 규례를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 땅에 33년 동안 살아계실 때 다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어긴 정죄와 형벌과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본문 5,6절입니다.
본문 5,6절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지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값으로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을 율법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완전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양심이나 율법이나 사탄도 우리를 다시는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죄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생명의 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 즉, 신분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는 상속인인 친아들이 어렸을 때를 말했지만 여기서는 양자로서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자로 입양했다고 하면 친아들 보다 어딘가 부족하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사회는 전쟁을 많이 치렀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녀를 많이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으면 대가 끊어지기 때문에 귀족들은 노예시장에 가서 노예들 중에 똑똑한 노예를 사서 양자로 입양합니다. 그 입양된 노예는 그 순간부터 그 귀족의 모든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받게 됩니다. 양자이지만 친아들과 똑같은 신분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않는 노예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와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거나 검투사로 팔려 짐승이나 사람과 검투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호의로 값을 완전히 지불하고 입양되면 이처럼 엄청난 특권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용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들의 신분을 주어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해방시켜 성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도록 하시고 상속받은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분의 속량 때문에 아들의 신분을 상속받는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입증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아들의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증명합니다(갈3:26). 성령은 우리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면서 계속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호칭도 율법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의식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용어가 나오면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르다 보니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의 정확한 발음을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번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순복음교회 등에서는 야웨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원어에 더 가깝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호칭이 아빠입니다. 마26: 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하실 때 원어로 여기 아버지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위로 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성령이 우리가 아들 됨을 증거해 주실 때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아빠 하나님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구 달려와 안길 때 ’아빠‘라고 하듯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빠를 부르고 달려갈 때 아무 염려없이 마음껏 달려드는 자녀들의 확신과 견고함, 그 친밀함과 가까움이 ’아빠‘라는 이름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에 “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노예와 같은 어린 상속인이 아니고 율법의 지배 아래서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고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충분이 갖춘 성인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상속자라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사를 받아 이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성도들은 이 세상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그곳에서 다시는 사망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과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기초석과 열두 진주문으로 되어 있고 유리같이 맑은 정금길이 나 있습니다. 해나 달이 필요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본향인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8절에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이 아닌 신 즉 우상숭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제우스나 헤르메스, 아폴로 등과 같은 거짓 신들과 우상을 섬기며 천성적으로 우상에 얽매어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몰랐고 종교적으로 우상숭배하는 관습을 통해 힘을 행사하던 사탄의 종노릇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세상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과 명예, 장수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의 욕망만을 쫓아 다투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9절에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의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을 암시하고, 9,10절에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귀신들에게 종노릇하는 것과 유대인들의 율법에 종노릇 하는 것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할례와 음식에 관한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의존하게 되면 예전에 믿던 이방종교와 우상숭배하며 종노릇하는 것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의 율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너희 믿음을 보여주려 한다면, 귀신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며, 예전에 우상숭배할 때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오늘날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각종 종교와 무속을 통해 사탄의 거짓 유혹이 사회 곳곳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대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그 공로를 차지하려는 한, 사탄은 여러분의 도덕적, 윤리적 선행이 무엇이든 간에 찬성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초등학문을 오늘날 세상지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인생의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부와 지위와 명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윤리와 도덕, 종교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의 문제를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등학문은 약하고 천박하여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하다는 것은 세상의 과학, 기술, 지식, 철학윤리 등은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은 속이 텅비어 있어서 우리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거나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상류계층 신분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을 딛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왜 다시 무기력하고 빈약해서 의롭게 하거나 경건한 삶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상속을 제공해주지도 못하는 약하고 유치한 초등학문인 세상지식과 또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 하느냐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은 성인된 자가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의 영향을 받아 갈라디아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특별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례를 지켰던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날을 지킨다는 것은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고 그 밖에 금식일, 하루만 지키는 율법의 규례에 의해 특별히 지키는 날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을 지킨다는 것은 매달 시작되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킨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과 유대인 전통에 의해 추가된 나팔절, 수전절 등을 말합니다. 해를 지킨다는 것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 50년 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는 이런 규례들을 절대시 하여 열심히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금식하고, 할례를 행하고, 날과 달과 해를 지키고는 것이 훨씬 더 외형적으로 잘 믿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올바른 믿음을 떠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헛된 열심과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체험을 찾습니다. 물론 바른 신앙 안에서는 반드시 영적 체험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들은 우선 기도로 병이 낫거나 방언하거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버리고 외적 은사와 체험, 혹은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신앙수준을 평가하게 되면 교회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계속해서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하고 초보적인 일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바울이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한 것이 헛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감으로써 구원을 잃게 될 것이 몸서리칠 만큼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심정도 바울과 같은 심정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다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상과 율법의 정죄와 죄와 사망과 사탄의 올무에서 매어있지 않고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분과 권세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항상 사용하십시오.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탄권세를 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어진 생업과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위해 열심히 헌신, 봉사하고 전도, 선교하다가 주님 부르시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림 받아 저 천국에서도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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