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율법과 약속
2025-07-30 20:58:52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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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갈3:15-25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7-30

수요설교 250730

본문: 3:15-25

제목: 율법과 약속

 

I. 서론

갈라디아서 1장에서 복음은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없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셨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31-14절까지는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율법과 약속이라는 형태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서 무엇이 복음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약속의 우선성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율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당신의 말처럼 믿음으로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430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600여개의 조항을 포함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하여 우리의 유업이 율법의 행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 유업을 물려받을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하나님이 430년 뒤에 율법을 추가했겠습니까?”라고 반론을 제기했을거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그 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고구조가 자기중심적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로, 자격, 조건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 내가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훌륭하다는 비교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대적 비교와 차별을 정당화하면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러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하니, 겉으로는 값없이 받는 구원의 진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에 불편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고 중직자가 됨으로 상대적으로 비교우위를 차지함으로 종교적 안정과 만족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열심과 공로주의로 안정감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참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약이란 사람의 유언이나 공증된 약속을 의미합니다. 작성된 유언은 그 유언장을 쓴 본인 외에는 아무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유언장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유언도 아무나 고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약속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예를 들어서 모세의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폐기하거나 변경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17절은 그 비유를 이렇게 적용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이란 창12,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입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고, 15: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5: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하거나 뭔가를 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우선이고 월등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을 주시는 방식과 모세를 통해 복을 주시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율법 안에서 행위로 축복을 얻으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율법을 추가하셨다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폐기되고 무효가 되었을 것입니다.

 

2. 한 자손 그리스도

그런데 본문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15:5네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자손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네 자손이라는 단수로 표현한 것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창21: 12절에서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는 이유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씨(자손)라고 부르는 데서 메시아로 그 절정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성경의 맥락 속에서 (자손)’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그것이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계시를 통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된다는 사실이 더 명백해진 것입니다. 16절의 약속된 유업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혈연적으로 유대인이며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났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믿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3:7절에 의하면 유대인 중 일부만 믿음의 삶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을 값주고 사셨습니다. 넷째, 지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없이 오직 그분께 속함으로써 참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고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29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16절의 요지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진 상속의 약속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의 약속을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면서 이미 그리스도를 바라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까지 바라보신 영원한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절대로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3. 약속과 함께 주어지는 유업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과 함께 또 다른 유업을 주셨습니다. 본문 18절에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업이란 유산, 상속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과 유사한 구절이 2:21절입니다.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율법을 지키는 것을 근거로 유업이 주어졌다면 유업은 약속된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분이 오셔서 죽으신 것이 헛된 일이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약속은 창12, 15장에 잘 나타납니다. 15:7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때 아브람이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니 하나님께서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하여 놓았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15: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 당시 풍습으로 왕과 신하가 충성을 맹세하고 계약을 맺는 방식입니다. 만약 어기면 중간을 두쪽으로 가른 짐승처럼 죽어도 좋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생명을 걸고 이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고, 그 땅에서 나는 온갖 풍성한 농산물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에게도 두 가지 유업을 주십니다. 첫째는 영적 가나안 땅인 천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상징하는 풍요와 부요함도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풍요와 부요함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건강, 장수, 재물, 지위, 명예 등 육신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그런 것들도 주시겠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주신 복음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풍요와 부요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무익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과 부요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면 받은 유업을 다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4. 율법이 주어진 이유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반문하게 됩니다. 본문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주신 네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죄 아래에 가두고 죄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19절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란 말은 22절에 성경이(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율법이 범법을 생산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한가지 의미는 4:15율법을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법도 없느니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법이 없을 때는 자기가 하는 행위가 죄인지 모르는데 법이 있으면 그 행위가 범죄 행위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의사를 불신하는 환자가 있다면 처방전을 써 주는데도 그것으로 약을 구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면 그 의사를 불신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율법은 단지 현재 존재하는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더 많은 죄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5:20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반역과 불순종과 불신이 율법을 만나면 더 강화되고 확장됩니다. 악한 마음의 성향들이 율법에 의해 드러날 뿐 아니라 율법에 의해 더욱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떠난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이어서 율법에 의해 비난 받게 되면 더 격렬하게 반발하고 자기를 방어하려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인에게 더 많은 자기 주장과 자기 만족을 일으킴으로써 죄를 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죄를 지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추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거울을 보여주면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와서 자신의 실체를 보여줄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죄성과 악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와서 자신의 체면, 문화, 교양 밑에 감추어진 본성을 들추어 내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신이 악취가 진동하는지를 깨닫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죄악된 자신의 본성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적 기준으로 자신은 그래도 남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은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죄성을 깨닫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약속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업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죄를 제거할 수 없고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이 왜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까? 그들이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고 새롭게 하는 성령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왜 사람들을 죄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까? 그것은 순종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마음은 오히려 율법을 거부하고 부도덕한 삶을 살거나 율법을 받아들여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유업인 새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이 필요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천사를 통해 모세라는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하신 것이지만, 율법은 천사와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 주어진 것이므로 약속이 더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그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중보자는 한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쌍방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약속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거나 쌍방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약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했기 때문에 변할 수 없고 율법보다 귀한 것입니다.

 

넷째,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전까지 있는 것입니다.

, 율법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악하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선하고 귀한 것이지만 약속과는 용도가 다릅니다. 본문 21절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야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용도대로 사용하지 않고 왜곡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도 율법이나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새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새생명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율법이나 양심은 우리가 떳떳하게 살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과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양심은 거듭나기 전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고 죄 아래 가두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죄 아래에 있는지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본문 23-25절은 이 사실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됨을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구약에도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다윗 등 수많은 구약성도들도 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실체적 진실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성도들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된 믿음의 때가 올 때까지 율법에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초등교사처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까지 율법의 감옥 속에 가두어두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사회에서 초등교사는 7-15세 미성년자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돕는 노예교사를 말합니다. 선생이지만 학과목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예절과 안전교육, 생활교육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그는 외적 통제 없이도 옳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될 때까지 미성년자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그는 아이의 마음을 선하게 만들 능력이나 유업도 줄 수 없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러한 초등교사는 필요 없습니다. 율법이 바로 이 초등교사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 두었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그분께 데리고 가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약속이 얼마나 필요한지 인식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약속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어두지만, 언약의 복음은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됩니다.

 

III.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가지를 적용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과 교만과 불순종의 깊은 뿌리를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께 교만과 반역과 불신과 불순종의 침전물이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면 말씀의 조명을 통해 드러내고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둘째,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인 오직 믿음, 오직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성령충만 받아 말씀순종함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수요설교 250730

본문: 3:15-25

제목: 율법과 약속

 

I. 서론

갈라디아서 1장에서 복음은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없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셨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31-14절까지는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율법과 약속이라는 형태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율법과 약속의 관계에서 무엇이 복음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약속의 우선성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율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당신의 말처럼 믿음으로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430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600여개의 조항을 포함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하여 우리의 유업이 율법의 행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 유업을 물려받을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하나님이 430년 뒤에 율법을 추가했겠습니까?”라고 반론을 제기했을거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그 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고구조가 자기중심적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로, 자격, 조건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 내가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훌륭하다는 비교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대적 비교와 차별을 정당화하면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러한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하니, 겉으로는 값없이 받는 구원의 진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에 불편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고 중직자가 됨으로 상대적으로 비교우위를 차지함으로 종교적 안정과 만족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열심과 공로주의로 안정감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참된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약이란 사람의 유언이나 공증된 약속을 의미합니다. 작성된 유언은 그 유언장을 쓴 본인 외에는 아무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유언장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고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유언도 아무나 고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약속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예를 들어서 모세의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폐기하거나 변경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17절은 그 비유를 이렇게 적용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이란 창12,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입니다.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고, 15: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5: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하거나 뭔가를 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우선이고 월등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을 주시는 방식과 모세를 통해 복을 주시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율법 안에서 행위로 축복을 얻으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율법을 추가하셨다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폐기되고 무효가 되었을 것입니다.

 

2. 한 자손 그리스도

그런데 본문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15:5네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자손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네 자손이라는 단수로 표현한 것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창21: 12절에서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는 이유로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씨(자손)라고 부르는 데서 메시아로 그 절정을 이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성경의 맥락 속에서 (자손)’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그것이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계시를 통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된다는 사실이 더 명백해진 것입니다. 16절의 약속된 유업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혈연적으로 유대인이며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났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믿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3:7절에 의하면 유대인 중 일부만 믿음의 삶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을 값주고 사셨습니다. 넷째, 지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없이 오직 그분께 속함으로써 참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고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29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16절의 요지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진 상속의 약속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의 약속을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면서 이미 그리스도를 바라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까지 바라보신 영원한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절대로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3. 약속과 함께 주어지는 유업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과 함께 또 다른 유업을 주셨습니다. 본문 18절에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업이란 유산, 상속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과 유사한 구절이 2:21절입니다.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율법을 지키는 것을 근거로 유업이 주어졌다면 유업은 약속된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분이 오셔서 죽으신 것이 헛된 일이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약속은 창12, 15장에 잘 나타납니다. 15:7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때 아브람이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니 하나님께서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하여 놓았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15: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 당시 풍습으로 왕과 신하가 충성을 맹세하고 계약을 맺는 방식입니다. 만약 어기면 중간을 두쪽으로 가른 짐승처럼 죽어도 좋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생명을 걸고 이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고, 그 땅에서 나는 온갖 풍성한 농산물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에게도 두 가지 유업을 주십니다. 첫째는 영적 가나안 땅인 천국,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상징하는 풍요와 부요함도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풍요와 부요함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건강, 장수, 재물, 지위, 명예 등 육신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그런 것들도 주시겠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주신 복음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풍요와 부요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무익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과 부요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면 받은 유업을 다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4. 율법이 주어진 이유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반문하게 됩니다. 본문 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주신 네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죄 아래에 가두고 죄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19절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란 말은 22절에 성경이(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율법이 범법을 생산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한가지 의미는 4:15율법을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법도 없느니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법이 없을 때는 자기가 하는 행위가 죄인지 모르는데 법이 있으면 그 행위가 범죄 행위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의사를 불신하는 환자가 있다면 처방전을 써 주는데도 그것으로 약을 구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면 그 의사를 불신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율법은 단지 현재 존재하는 죄를 드러낼 뿐 아니라 더 많은 죄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5:20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반역과 불순종과 불신이 율법을 만나면 더 강화되고 확장됩니다. 악한 마음의 성향들이 율법에 의해 드러날 뿐 아니라 율법에 의해 더욱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떠난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이어서 율법에 의해 비난 받게 되면 더 격렬하게 반발하고 자기를 방어하려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인에게 더 많은 자기 주장과 자기 만족을 일으킴으로써 죄를 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죄를 지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추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거울을 보여주면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와서 자신의 실체를 보여줄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죄성과 악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와서 자신의 체면, 문화, 교양 밑에 감추어진 본성을 들추어 내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신이 악취가 진동하는지를 깨닫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죄악된 자신의 본성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그저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적 기준으로 자신은 그래도 남보다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은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죄성을 깨닫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약속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업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죄를 제거할 수 없고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이 왜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까? 그들이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고 새롭게 하는 성령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왜 사람들을 죄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까? 그것은 순종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마음은 오히려 율법을 거부하고 부도덕한 삶을 살거나 율법을 받아들여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유업인 새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이 필요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천사를 통해 모세라는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하신 것이지만, 율법은 천사와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 주어진 것이므로 약속이 더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그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중보자는 한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쌍방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약속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거나 쌍방에 의해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약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했기 때문에 변할 수 없고 율법보다 귀한 것입니다.

 

넷째,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전까지 있는 것입니다.

, 율법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악하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선하고 귀한 것이지만 약속과는 용도가 다릅니다. 본문 21절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야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용도대로 사용하지 않고 왜곡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도 율법이나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새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새생명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율법이나 양심은 우리가 떳떳하게 살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과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과 양심은 거듭나기 전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고 죄 아래 가두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죄 아래에 있는지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본문 23-25절은 이 사실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됨을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구약에도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다윗 등 수많은 구약성도들도 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실체적 진실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성도들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된 믿음의 때가 올 때까지 율법에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초등교사처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까지 율법의 감옥 속에 가두어두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사회에서 초등교사는 7-15세 미성년자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돕는 노예교사를 말합니다. 선생이지만 학과목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예절과 안전교육, 생활교육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그는 외적 통제 없이도 옳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될 때까지 미성년자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그는 아이의 마음을 선하게 만들 능력이나 유업도 줄 수 없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러한 초등교사는 필요 없습니다. 율법이 바로 이 초등교사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 두었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그분께 데리고 가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양심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약속이 얼마나 필요한지 인식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약속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어두지만, 언약의 복음은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철로가 됩니다.

 

III.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가지를 적용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과 교만과 불순종의 깊은 뿌리를 드러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께 교만과 반역과 불신과 불순종의 침전물이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면 말씀의 조명을 통해 드러내고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둘째,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그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인 오직 믿음, 오직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성령충만 받아 말씀순종함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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