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요20: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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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5-14 |
수요설교 250514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본문: 요20: 19-31
제목: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I. 서론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인 반면에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예수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빈무덤을 강조지만,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믿음의 양면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예수 부활만을 믿는 것은 예수 부활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뿐 아니라 그 예수님을 날마다 영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는 사람입니다. 열린 영적 눈으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영의 손으로 못박힌 손을 만져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무덤에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고 어서 형제들에게 가서 이 부활소식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씀을 듣고 급히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숨어있던 열명의 제자들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도마는 그때 그곳에 없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0일 동안 500여 형제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바울에게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며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일곱귀신 들린 여자였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시고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 안식일이 곧 시작되는 오후 6시경까지는 장사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두 세시간 밖에 없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몇몇 여인들이 아무리 손을 모은다 해도 예수님의 시신을 씻기고 향료를 넣고 베옷을 감싸서 무덤에 장사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대충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이일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후 마리아는 금, 토요일 이틀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사흘째 되는 일요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사흘 전에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미비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자기 혼자서라도 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놀라운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덤문이 열렸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본 마리아는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슬픔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마리아야’라고 자기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음성임을 알고 “선생님”하면서 와락 달려가 안기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순간 그의 슬픔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눈물이 흐르던 눈은 기쁨이 충만해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시30:11절 “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는 말씀처럼 그러한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슬픔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돌아서면 눈물을 흘립니다. 전2: 23절에 “일 평생에 근심하고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했듯이 밤낮으로 슬픔에 둘러싸여 괴로워하며 몸부림 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넉넉히 딛고 일어나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묵상하는 중에, 찬양하거나 기도하는 중에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믿음으로 듣고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맨 먼저 열명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가룟유다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도마는 외출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짓눌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한창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때는 제자들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험악한 분위기가 제자들 주변을 점점 조여들었습니다. “우리 선생님도 저토록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들인 우린들 가만히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공포감이 밀려와 밤중에도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바로 그때, 문이 닫겨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식간에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났음을 확신시켜주기 위하여 상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눅24:41-43절을 보면 제자들 중에 그래도 예수님의 영이 아닌가 의심하는 자가 있는 것 같으니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며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21절에 그들에게 다시 한번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내시며 영적 무장을 시켜주셨습니다. 본문 22-23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고 담대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은근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스탈린이 일년에 칠만명을 총살시키는 현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에 몰아 넣어 살해한 끔직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사건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까? 지금도 전쟁은 끊임없고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욥은 동양의 최대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욥3:25절에 ”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욥조차 평소에도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면 보통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또한 그는 실제로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얼마나 끔직한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공포를 쫓아내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두려움 뿐 아니라 죽음의 공포까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이기셨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날마다 나를 만나주시는 이상,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늘날도 우리에게 동일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도마라는 제자를 살펴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명의 제자들을 만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흥분해서 말할 때 은근히 마음으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않고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본문 25절에 ”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도마처럼 의심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잣대로 재어보고 믿으려 합니다. 본문 26절에 보니 8일이 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문이 닫혀있는데도 다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하시고, 27절에 의심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28절에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자 바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정확하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도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 수십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약간 엉뚱하지만 정직하고 솔직하고 의심이 가면 그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 온 자연법칙과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한 것입니다. 그는 고집스럽지만 부정직한 모습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한 의심입니다. 요한이 이 도마의 이야기를 한 것은 정직한 의심은 부활을 믿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경우는 많지만 하나님으로 고백한 사람은 도마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도마의 믿음은 주님을 믿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정직하게 의심하고 주님께 묻는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7:17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정직한 의심은 바람직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의심이 사라지자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변화되어 선교하며 순교의 자리까지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영화 <벤허>의 원작 소설을 쓴 ‘루 윌리스’는 성경의 거짓됨을 밝혀내려고 성경을 읽다가 변화되어 벤허를 저술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 그대로 투영했습니다. 벤허는 원래 칼과 창으로 유대민족을 해방시키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벤허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니키 검불’은 영국 캠브리지대 학생시절 친구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성경의 허구성을 파헤치려고 성경을 읽다가 오히려 변화되어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 알파를 창시했습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정직하게 의심해서 스스로 부활의 주님을 확신해야 의심이 사라지고 변화됩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듣기를 바랍니다. 본문 29절에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했지 그것이 ‘더 복되도다’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믿거나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거든,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든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은 그 시공간의 제한으로 인해 소수의 사람이었지만, 지금 온 인류는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 시공간의 제한없이 누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보지 않고도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형, 베드로 형, 도마형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형이든 상관없이 예수를 만나면 믿을 수 있게 되고 변화됩니다. 그럴 때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듭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눈에는 소망으로 가득찬 미래가 보입니다.
4. 성령충만 받으면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창2:7절을 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인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숨을 머금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타락하므로 그 생명을 잃었습니다. 육체의 목숨은 붙어있지만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류는 제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숨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숨이 끊어져 마른 뼈가 된 인간을 살리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혼으로 창조하셨듯이, 본문 22절에 예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새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본래 받았던 생명을 잃었다가, 예수님이 주신 성령으로 인해 새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 성령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을 때, 성화될 때,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각 단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성령충만은 날마다 필요하므로 성령충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은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둘째, 성령받은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셋째, 성령받은 사람은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도 아직 완전히 성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하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넷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완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사람은 온유한 심령을 갖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단지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성령충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 받아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요한이 이 요한복음을 쓸 때 예수님이 행한 표적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내용을 선별해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 이유는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도록 하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계속 잘 믿게 하기 위해 본서를 쓴 것입니다.
증언에는 객관적 사실이 있어야 하고, 본 사람의 주관적 기억과 말이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들었거나 전해들은 것을 자신이 체험한 바대로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이런 증언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이 체험한 그 예수님을 증언해야 전도가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안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표적과 말씀으로 전도했지만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을 받아 부지런히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고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용기가 생깁니다. 때로는 의심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주님을 만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면 그 체험을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성령충만 받고 성령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나 유타주에 가면 거대한 협곡들이 많습니다. 빗물이 모여서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강을 이루어 흘러가면서 바위들과 대지를 침식해가다 보면 그랜드 캐니언 같은 거대한 협곡이 생깁니다. 그 빗물이 거대한 협곡을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빗물이 일년에 1mm씩만 바위를 깎아내린다고 가정해도 만년이면 1만mm, 즉 10m나 깎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서 변화되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당장은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닐지라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금씩 닮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되도록 성령충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충만 받도록 말씀의 약속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남으로 모든 슬픔과 공포와 의심이 떠나가고, 기쁨과 평강과 확신을 체험하며, 이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
수요설교 250514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본문: 요20: 19-31
제목: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I. 서론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인 반면에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예수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빈무덤을 강조지만,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믿음의 양면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예수 부활만을 믿는 것은 예수 부활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뿐 아니라 그 예수님을 날마다 영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는 사람입니다. 열린 영적 눈으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영의 손으로 못박힌 손을 만져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무덤에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고 어서 형제들에게 가서 이 부활소식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씀을 듣고 급히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숨어있던 열명의 제자들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도마는 그때 그곳에 없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0일 동안 500여 형제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바울에게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며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일곱귀신 들린 여자였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셨기 때문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시고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 안식일이 곧 시작되는 오후 6시경까지는 장사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두 세시간 밖에 없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몇몇 여인들이 아무리 손을 모은다 해도 예수님의 시신을 씻기고 향료를 넣고 베옷을 감싸서 무덤에 장사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대충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이일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후 마리아는 금, 토요일 이틀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사흘째 되는 일요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사흘 전에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미비했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자기 혼자서라도 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놀라운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덤문이 열렸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본 마리아는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슬픔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마리아야’라고 자기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음성임을 알고 “선생님”하면서 와락 달려가 안기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순간 그의 슬픔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눈물이 흐르던 눈은 기쁨이 충만해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시30:11절 “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는 말씀처럼 그러한 기쁨을 체험한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슬픔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돌아서면 눈물을 흘립니다. 전2: 23절에 “일 평생에 근심하고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했듯이 밤낮으로 슬픔에 둘러싸여 괴로워하며 몸부림 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도 넉넉히 딛고 일어나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묵상하는 중에, 찬양하거나 기도하는 중에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믿음으로 듣고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맨 먼저 열명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가룟유다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도마는 외출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짓눌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한창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때는 제자들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험악한 분위기가 제자들 주변을 점점 조여들었습니다. “우리 선생님도 저토록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들인 우린들 가만히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공포감이 밀려와 밤중에도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바로 그때, 문이 닫겨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식간에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났음을 확신시켜주기 위하여 상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눅24:41-43절을 보면 제자들 중에 그래도 예수님의 영이 아닌가 의심하는 자가 있는 것 같으니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며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21절에 그들에게 다시 한번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내시며 영적 무장을 시켜주셨습니다. 본문 22-23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고 담대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은근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스탈린이 일년에 칠만명을 총살시키는 현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에 몰아 넣어 살해한 끔직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사건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까? 지금도 전쟁은 끊임없고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갑니다.
욥은 동양의 최대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욥3:25절에 ”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욥조차 평소에도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다면 보통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또한 그는 실제로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사탄의 시험으로 인해 얼마나 끔직한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공포를 쫓아내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두려움 뿐 아니라 죽음의 공포까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이기셨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날마다 나를 만나주시는 이상,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늘날도 우리에게 동일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도마라는 제자를 살펴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명의 제자들을 만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흥분해서 말할 때 은근히 마음으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않고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본문 25절에 ”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도마처럼 의심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잣대로 재어보고 믿으려 합니다. 본문 26절에 보니 8일이 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문이 닫혀있는데도 다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하시고, 27절에 의심많은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28절에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자 바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정확하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도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 수십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약간 엉뚱하지만 정직하고 솔직하고 의심이 가면 그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 온 자연법칙과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한 것입니다. 그는 고집스럽지만 부정직한 모습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한 의심입니다. 요한이 이 도마의 이야기를 한 것은 정직한 의심은 부활을 믿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경우는 많지만 하나님으로 고백한 사람은 도마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도마의 믿음은 주님을 믿되 믿어지지 않는 것은 정직하게 의심하고 주님께 묻는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7:17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정직한 의심은 바람직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의심이 사라지자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변화되어 선교하며 순교의 자리까지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영화 <벤허>의 원작 소설을 쓴 ‘루 윌리스’는 성경의 거짓됨을 밝혀내려고 성경을 읽다가 변화되어 벤허를 저술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 그대로 투영했습니다. 벤허는 원래 칼과 창으로 유대민족을 해방시키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벤허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니키 검불’은 영국 캠브리지대 학생시절 친구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성경의 허구성을 파헤치려고 성경을 읽다가 오히려 변화되어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 알파를 창시했습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정직하게 의심해서 스스로 부활의 주님을 확신해야 의심이 사라지고 변화됩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듣기를 바랍니다. 본문 29절에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했지 그것이 ‘더 복되도다’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믿거나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거든,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양으로든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당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은 그 시공간의 제한으로 인해 소수의 사람이었지만, 지금 온 인류는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 시공간의 제한없이 누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보지 않고도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형, 베드로 형, 도마형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형이든 상관없이 예수를 만나면 믿을 수 있게 되고 변화됩니다. 그럴 때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듭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눈에는 소망으로 가득찬 미래가 보입니다.
4. 성령충만 받으면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창2:7절을 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체인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숨을 머금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타락하므로 그 생명을 잃었습니다. 육체의 목숨은 붙어있지만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류는 제한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숨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숨이 끊어져 마른 뼈가 된 인간을 살리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혼으로 창조하셨듯이, 본문 22절에 예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새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본래 받았던 생명을 잃었다가, 예수님이 주신 성령으로 인해 새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 성령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을 때, 성화될 때,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각 단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성령충만은 날마다 필요하므로 성령충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은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둘째, 성령받은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셋째, 성령받은 사람은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도 아직 완전히 성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하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넷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완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사람은 온유한 심령을 갖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단지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성령충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 받아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요한이 이 요한복음을 쓸 때 예수님이 행한 표적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내용을 선별해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그 이유는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전도와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도록 하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계속 잘 믿게 하기 위해 본서를 쓴 것입니다.
증언에는 객관적 사실이 있어야 하고, 본 사람의 주관적 기억과 말이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들었거나 전해들은 것을 자신이 체험한 바대로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언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이런 증언이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이 체험한 그 예수님을 증언해야 전도가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안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표적과 말씀으로 전도했지만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과 인도하심을 받아 부지런히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고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용기가 생깁니다. 때로는 의심 때문에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주님을 만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면 그 체험을 또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성령충만 받고 성령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나 유타주에 가면 거대한 협곡들이 많습니다. 빗물이 모여서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강을 이루어 흘러가면서 바위들과 대지를 침식해가다 보면 그랜드 캐니언 같은 거대한 협곡이 생깁니다. 그 빗물이 거대한 협곡을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빗물이 일년에 1mm씩만 바위를 깎아내린다고 가정해도 만년이면 1만mm, 즉 10m나 깎이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서 변화되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당장은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닐지라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금씩 닮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되도록 성령충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충만 받도록 말씀의 약속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남으로 모든 슬픔과 공포와 의심이 떠나가고, 기쁨과 평강과 확신을 체험하며, 이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증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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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 믿음으로 의롭게 됨 | 갈2:11-16 | 2025-07-02 | 홍기칠 목사 |
62 |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사도직과 복음 | 갈1:11-24 | 2025-06-18 | 홍기칠 목사 |
61 | 복음의 유일성 | 갈1:6-10 | 2025-06-11 | 홍기칠 목사 |
60 | 그리스도의 복음 | 갈1:1-5 | 2025-06-04 | 홍기칠 목사 |
59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요21:15-25 | 2025-05-28 | 홍기칠 목사 |
58 | 필요를 채워주시는 부활의 주님 | 요21:1-14 | 2025-05-21 | 홍기칠 목사 |
57 |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 요20:19-31 | 2025-05-14 | 홍기칠 목사 |
56 | 숨은 제자 | 요19:31-42 | 2025-05-07 | 홍기칠 목사 |
55 | 다 이루었다 | 요19:17-30 | 2025-04-30 | 홍기칠 목사 |
54 | 빌라도 재판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 요18:28-19:16 | 2025-04-23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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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20250319 수요설교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16-33) | |||
49 | 20250312 수요설교 (성령께서 하시는 일/요16: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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