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설교본문 | 창4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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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6-22 |
주일오후설교 250622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본문: 창43: 1-34
제목: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I. 서론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내려와 애굽총리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22년 만에 형제들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그 형들은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것을 기억하고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그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아는 체 하지 않고 정탐꾼으로 몰아세웁니다. 결국 시므온만 인질로 남고 나머지 형들에게는 양식을 주고, 그들이 가져온 돈까지 다시 자루에 넣어 돌아가게 합니다.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집에 있는 막내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시므온을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 자루에 양식을 사려고 가져간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알고 몹시 당황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야곱에게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야곱은 그 아들들이 한 행동을 꾸중하며 선뜻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창43장은 그들이 다시 애굽으로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요셉을 만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모든 형제를 만나게 한 하나님의 섭리와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요셉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2년째 기근을 맞고 있는데 이제 가져온 양식이 바닥이 났습니다. 이런 기근을 앞으로 5년이나 더 겪어야 했습니다. 이 지경에서 추측건데 많은 가축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가축들이 많은 부자였는데 이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아버지에게 다시 애굽으로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본문 2절에 야곱이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옳은 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질 못했습니다. 베냐민을 데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유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서 어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애굽총리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애굽총리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경고를 했기 때문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형들은 권력과 힘이 있는 애굽총리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거대한 세상의 힘과 권력과 재력 앞에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둘째,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문제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바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이고,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애굽에서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이 만사형통, 일사천리가 아니라 현실이 너무 힘들어 진퇴양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결책은 단 한가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엉뚱하게도 이 상황의 책임을 아들들에게 돌리면서 원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고 핵심을 피해 중요하지 않는 부분을 놓고 서로 시비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식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대부분의 경우 자식문제는 부모가 잘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납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으로 남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이러니 야곱의 아들들이 항변합니다. 본문 7절에 애굽총리가 아버지가 있느냐고 해서 있다고 했고, 동생이 있느냐고 해서 있다고 말했는데 그 동생을 데려오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아버지에게 이야기 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현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끼어들고 싶지 않은 일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되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어떤 섭리와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영적인 눈을 떠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도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해석이 안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복의 통로가 된다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비밀이 보이기 시작하고 희망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유다가 “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9-10절에서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면 자기 생명을 걸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루우벤도 이미 자기 두 아들을 담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목숨을 걸고 베냐민을 지켜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유다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것입니다. 9절에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유다가 리더십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었고 원래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 루우벤은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장자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둘째 시므온은 지금 애굽에 포로로 잡혀있을 뿐 아니라 셋째 레위와 함께 누이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세겜족속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형제들의 리더십은 유다에게 넘어 온 것입니다. 유다는 원래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넣었을 때 같은 혈육인데 죽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형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 지나가자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요셉을 죽음에서 건진 사람도 유다이지만 애굽으로 팔아넘긴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그 후에 유다는 굉장히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긴 세월이 흐르자 유다는 이제 이렇게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용기있게 나선 유다는 비록 며느리 다말과 부적절한 관계를 했지만 메시아가 탄생하신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2. 내 것을 포기할 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이 유다의 말을 듣고 야곱은 최종적으로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애굽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본문 11절에 야곱은 드디어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허락합니다. 그러고는 역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본문 11-12절에 애굽총리에게 줄 예물을 준비하고 곡식을 살 돈도 지난번 돌려 받은 돈을 두배나 넣어서 다시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도 데리고 가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에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누구보다 애착을 가졌던 막내 아들 베냐민을 포기합니다. 베냐민은 자기가 사랑했던 라헬을 통해 얻은 요셉의 동생이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드디어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뇌물 성격의 그 지방의 특산물을 좀 가져가라고 합니다. 곡식을 사려고 가져간 돈을 도로 가져왔으니 혹시 모를 오해가 있으면 곤란하니 돈을 두배나 더 가져가도록 세밀하게 준비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야곱의 주특기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뇌물을 싸 들고 가는 것입니다. 형 에서를 만날 때도 제일 먼저 엄청난 재물을 형에게 보내고 자기 식구들도 자기가 덜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앞장 세워 에서를 만나러 갔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방법입니다. 돈과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아들이 애굽으로 떠날 때 그제서야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베냐민을 내어주기가 그토록 어려워 끝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아들을 다 집에서 내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근심 속에서 인내해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진퇴양난의 위기를 만나면 죽을 때까지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고 아둥바둥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돼서야 내려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야곱을 비난할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자기 소유를 포기할 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16:2ㅂ4절에서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데 자신을 포기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억지로 빼앗기느냐 자진해서 주느냐의 차이일 뿐 비워야 채움이 있습니다. 야곱도 포기하고 나니 그제서야 하나님이 보이고 기도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포기한 후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야곱이 드디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입으로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기도요 겸손인 것입니다. 다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야곱이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포기한 것입니다. 자식을 포기해야 하나님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자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 자식을 내어놓으십시오. 그래야 자녀가 변합니다. 내가 키우면 나 정도 밖에 클 수 없습니다. 양육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포기는 자유를 낳습니다. 포기는 자녀를 자율적이고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 총리 요셉에게 오자 요셉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포기하기 어려운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포기는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포기했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이 다시 애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포기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고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포기한 베냐민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들의 누명을 벗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20여년 만에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혼자 방에들어가 엉엉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고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며 헌신하셨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포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시련은 회개와 회복으로 인도하는 도구
본문 17-18절을 보니 요셉은 기뻐서 형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데 형들은 긴장되고 두려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좋은 일을 만나든지 나쁜 일을 만나든지 겁부터 냅니다. 그들은 돈을 훔치지도 않고 그 돈을 도로 2배나 가져왔는데 왜 불안해 했을까요? 인간의 본질은 두려움이요 불안입니다. 죽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습니다. 인간 안에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불안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듭니다. 불길하고 나쁜 상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생긴 현상일 뿐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레 겁을 먹고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기들 자루에 들어 있었던 돈은 자기들이 훔친 것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며 변명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인간은 진실해집니다. 요셉의 형들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살인하고, 아버지의 첩을 범하고, 형제끼리 거짓말하고 다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죽을 형편에 처하다 요셉의 청지기에게 까지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고 평안할 때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닥칠 때 우리는 자신의 허물과 약점이 보이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련의 의미요 고난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형들이 그 돈은 자신들이 모르는 돈이어서 도로 가져왔다고 했고 양식을 사기 위한 돈은 따로 챙겨왔다고 했을 때 요셉의 청지기는 본문 23절에 “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준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라고 했습니다. 이 청지기는 분명히 애굽사람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나안의 하나님도 될 수 있고 애굽의 하나님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복음은 온 인류에게 다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지만 인간이 다시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개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사실은 엄청나고 놀라운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한계와 시련은 그리스도의 품속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깨달았을 때 속히 회개하고 거기서 돌아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불과 보름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광야에서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그들을 낮추게 하고 순종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과 시험을 허락하심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주님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본문 25-26절에 보니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요셉이 집으로 오니까 그들이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요셉과 11형제들이 20여년만에 기막힌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도 기막힌 만남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예수님 오신 이전 BC와 예수님이 오신 이후 AD로 구분되어 기록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도 BC와 AD 즉 주님 만난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놀라운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마음과 형들의 마음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감사와 즐거움으로 가득했지만 형들은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막대동생 베냐민을 보는 순간 울음을 참을 수 없어 안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고 나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에 대한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형들보고는 대성통곡하지 않았지만 베냐민을 보고는 대성통곡을 한 것은 그만큼 동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머니 라헬의 아들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요셉이 베냐민을 사랑하는 마음 그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중하고 최고의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포기하는 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남편 혹은 아내를 위해 얼마나 자신의 자존심, 인격, 가진 것을 포기하셨습니까? 부부 사이에는 잘 안되도 부모 자식 간에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는 무조건 포기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호흡,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DNA 유전자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형상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실수하고, 타락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셉이 설명할 수 없는 사랑으로 베냐민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본문 32-34절에 보니 12명의 형제들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애굽의 문화에 따라 요셉과 그 형제들에게 음식을 따로 차리고,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이 앉는 자리가 나이 순서대로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을 그 형제들이 보고 서로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특히 베냐민에게는 요셉이 다른 형제들 보다 다섯 배나 더 주었다고 했습니다. 두 배도 아니고 다섯 배나 더 주었다는 것은 요셉이 베냐민을 얼마나 더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그것을 보고 예전처럼 시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심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베냐민이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20여년 헤어졌던 12명의 형제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시기와 미움으로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나님은 요셉을 선지자로 세우셔서 상처 입은 형제들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한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주 마다 말씀의 잔치를 벌이시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영적 식사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삶에서 힘들고 어렵고 상처난 심령을 주님께 내어 놓고 깊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와 새롭게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받아 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 함께 복음을 누리며 이 복음을 증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622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본문: 창43: 1-34
제목: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I. 서론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내려와 애굽총리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22년 만에 형제들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그 형들은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것을 기억하고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그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아는 체 하지 않고 정탐꾼으로 몰아세웁니다. 결국 시므온만 인질로 남고 나머지 형들에게는 양식을 주고, 그들이 가져온 돈까지 다시 자루에 넣어 돌아가게 합니다.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집에 있는 막내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시므온을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 자루에 양식을 사려고 가져간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알고 몹시 당황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야곱에게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야곱은 그 아들들이 한 행동을 꾸중하며 선뜻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창43장은 그들이 다시 애굽으로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요셉을 만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모든 형제를 만나게 한 하나님의 섭리와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요셉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2년째 기근을 맞고 있는데 이제 가져온 양식이 바닥이 났습니다. 이런 기근을 앞으로 5년이나 더 겪어야 했습니다. 이 지경에서 추측건데 많은 가축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가축들이 많은 부자였는데 이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아버지에게 다시 애굽으로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본문 2절에 야곱이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옳은 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질 못했습니다. 베냐민을 데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유다가 드디어 용기를 내서 어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애굽총리가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애굽총리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경고를 했기 때문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형들은 권력과 힘이 있는 애굽총리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거대한 세상의 힘과 권력과 재력 앞에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둘째,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문제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바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이고,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애굽에서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이 만사형통, 일사천리가 아니라 현실이 너무 힘들어 진퇴양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결책은 단 한가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엉뚱하게도 이 상황의 책임을 아들들에게 돌리면서 원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고 핵심을 피해 중요하지 않는 부분을 놓고 서로 시비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식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대부분의 경우 자식문제는 부모가 잘못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납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으로 남을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이러니 야곱의 아들들이 항변합니다. 본문 7절에 애굽총리가 아버지가 있느냐고 해서 있다고 했고, 동생이 있느냐고 해서 있다고 말했는데 그 동생을 데려오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아버지에게 이야기 합니다. 전혀 예기치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현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끼어들고 싶지 않은 일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되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어떤 섭리와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영적인 눈을 떠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도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해석이 안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복의 통로가 된다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비밀이 보이기 시작하고 희망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유다가 “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9-10절에서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면 자기 생명을 걸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루우벤도 이미 자기 두 아들을 담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목숨을 걸고 베냐민을 지켜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유다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것입니다. 9절에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맹세했습니다.
유다가 리더십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었고 원래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 루우벤은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장자의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둘째 시므온은 지금 애굽에 포로로 잡혀있을 뿐 아니라 셋째 레위와 함께 누이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하자 세겜족속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형제들의 리더십은 유다에게 넘어 온 것입니다. 유다는 원래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넣었을 때 같은 혈육인데 죽일 필요가 있겠느냐고 형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 지나가자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요셉을 죽음에서 건진 사람도 유다이지만 애굽으로 팔아넘긴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그 후에 유다는 굉장히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긴 세월이 흐르자 유다는 이제 이렇게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용기있게 나선 유다는 비록 며느리 다말과 부적절한 관계를 했지만 메시아가 탄생하신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2. 내 것을 포기할 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이 유다의 말을 듣고 야곱은 최종적으로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애굽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본문 11절에 야곱은 드디어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허락합니다. 그러고는 역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본문 11-12절에 애굽총리에게 줄 예물을 준비하고 곡식을 살 돈도 지난번 돌려 받은 돈을 두배나 넣어서 다시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도 데리고 가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에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누구보다 애착을 가졌던 막내 아들 베냐민을 포기합니다. 베냐민은 자기가 사랑했던 라헬을 통해 얻은 요셉의 동생이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드디어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뇌물 성격의 그 지방의 특산물을 좀 가져가라고 합니다. 곡식을 사려고 가져간 돈을 도로 가져왔으니 혹시 모를 오해가 있으면 곤란하니 돈을 두배나 더 가져가도록 세밀하게 준비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야곱의 주특기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뇌물을 싸 들고 가는 것입니다. 형 에서를 만날 때도 제일 먼저 엄청난 재물을 형에게 보내고 자기 식구들도 자기가 덜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앞장 세워 에서를 만나러 갔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방법입니다. 돈과 재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아들이 애굽으로 떠날 때 그제서야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베냐민을 내어주기가 그토록 어려워 끝까지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베냐민을 데리고 가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제 야곱은 모든 아들을 다 집에서 내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근심 속에서 인내해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진퇴양난의 위기를 만나면 죽을 때까지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고 아둥바둥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돼서야 내려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야곱을 비난할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자기 소유를 포기할 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16:2ㅂ4절에서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은데 자신을 포기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억지로 빼앗기느냐 자진해서 주느냐의 차이일 뿐 비워야 채움이 있습니다. 야곱도 포기하고 나니 그제서야 하나님이 보이고 기도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포기한 후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야곱이 드디어 하나님을 생각하고 입으로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기도요 겸손인 것입니다. 다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야곱이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포기한 것입니다. 자식을 포기해야 하나님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자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 자식을 내어놓으십시오. 그래야 자녀가 변합니다. 내가 키우면 나 정도 밖에 클 수 없습니다. 양육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포기는 자유를 낳습니다. 포기는 자녀를 자율적이고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형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 총리 요셉에게 오자 요셉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포기하기 어려운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의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포기는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포기했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이 다시 애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포기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고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포기한 베냐민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들의 누명을 벗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20여년 만에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혼자 방에들어가 엉엉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헌신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고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며 헌신하셨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포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3. 시련은 회개와 회복으로 인도하는 도구
본문 17-18절을 보니 요셉은 기뻐서 형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데 형들은 긴장되고 두려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좋은 일을 만나든지 나쁜 일을 만나든지 겁부터 냅니다. 그들은 돈을 훔치지도 않고 그 돈을 도로 2배나 가져왔는데 왜 불안해 했을까요? 인간의 본질은 두려움이요 불안입니다. 죽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습니다. 인간 안에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불안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듭니다. 불길하고 나쁜 상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생긴 현상일 뿐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레 겁을 먹고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기들 자루에 들어 있었던 돈은 자기들이 훔친 것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며 변명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인간은 진실해집니다. 요셉의 형들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살인하고, 아버지의 첩을 범하고, 형제끼리 거짓말하고 다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죽을 형편에 처하다 요셉의 청지기에게 까지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고 평안할 때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닥칠 때 우리는 자신의 허물과 약점이 보이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련의 의미요 고난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형들이 그 돈은 자신들이 모르는 돈이어서 도로 가져왔다고 했고 양식을 사기 위한 돈은 따로 챙겨왔다고 했을 때 요셉의 청지기는 본문 23절에 “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준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라고 했습니다. 이 청지기는 분명히 애굽사람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나안의 하나님도 될 수 있고 애굽의 하나님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복음은 온 인류에게 다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지만 인간이 다시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개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사실은 엄청나고 놀라운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한계와 시련은 그리스도의 품속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깨달았을 때 속히 회개하고 거기서 돌아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불과 보름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광야에서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그들을 낮추게 하고 순종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과 시험을 허락하심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우리의 주님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본문 25-26절에 보니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요셉이 집으로 오니까 그들이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요셉과 11형제들이 20여년만에 기막힌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도 기막힌 만남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예수님 오신 이전 BC와 예수님이 오신 이후 AD로 구분되어 기록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도 BC와 AD 즉 주님 만난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놀라운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마음과 형들의 마음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감사와 즐거움으로 가득했지만 형들은 두렵고 불안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막대동생 베냐민을 보는 순간 울음을 참을 수 없어 안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고 나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에 대한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형들보고는 대성통곡하지 않았지만 베냐민을 보고는 대성통곡을 한 것은 그만큼 동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머니 라헬의 아들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요셉이 베냐민을 사랑하는 마음 그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중하고 최고의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포기하는 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남편 혹은 아내를 위해 얼마나 자신의 자존심, 인격, 가진 것을 포기하셨습니까? 부부 사이에는 잘 안되도 부모 자식 간에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는 무조건 포기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호흡,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DNA 유전자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형상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실수하고, 타락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셉이 설명할 수 없는 사랑으로 베냐민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본문 32-34절에 보니 12명의 형제들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했습니다. 애굽의 문화에 따라 요셉과 그 형제들에게 음식을 따로 차리고,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이 앉는 자리가 나이 순서대로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을 그 형제들이 보고 서로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특히 베냐민에게는 요셉이 다른 형제들 보다 다섯 배나 더 주었다고 했습니다. 두 배도 아니고 다섯 배나 더 주었다는 것은 요셉이 베냐민을 얼마나 더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들은 그것을 보고 예전처럼 시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심하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베냐민이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20여년 헤어졌던 12명의 형제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시기와 미움으로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나님은 요셉을 선지자로 세우셔서 상처 입은 형제들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한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주 마다 말씀의 잔치를 벌이시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영적 식사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삶에서 힘들고 어렵고 상처난 심령을 주님께 내어 놓고 깊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와 새롭게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받아 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 함께 복음을 누리며 이 복음을 증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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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요셉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섭리 | 창45:1-15 | 2025-07-06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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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 창43:1-34 | 2025-06-22 | 홍기칠 목사 |
59 |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 창42: 18-38 | 2025-06-15 | 홍기칠 목사 |
58 | 숨겨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 창42:1-17 | 2025-06-08 | 홍기칠 목사 |
57 | 요셉을 애굽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 | 창41:37-57 | 2025-06-01 | 홍기칠 목사 |
56 | 바로왕의 꿈을 해석한 요셉 | 창41:1-36 | 2025-05-25 | 홍기칠 목사 |
55 | 요셉의 꿈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뤙 | 창40:1-23 | 2025-05-18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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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다말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 창38:1-30 | 2025-04-27 | 홍기칠 목사 |
51 |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 창32: 12-36 | 2025-04-13 | 홍기칠 목사 |
50 | 요셉의 꿈 | 창37:1-11 | 2025-04-06 | 홍기칠 목사 |
49 | 에서의 후손 | 창36: 1-43 | 2025-03-30 | 홍기칠 목사 |
48 | 20250316 주일오후설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창35: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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