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설교본문 | 창48: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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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8-03 |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803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본문:창48:1-22
제목: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I. 서론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야기는 야곱에 관한 것입니다. 야곱 이야기는 창27장에서 50장까지 이어집니다. 창세기의 거의 절반이 야곱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야곱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야곱 이야기는 곧 이스라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실제로 후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147세까지 산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요셉과 그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야곱은 끝까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야곱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은 놀랍게도 히11: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믿음 장이라고 알려진 히11장에서 야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면을 야곱의 대표적인 믿음의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인생의 최후 종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과 같이 미련한 것입니다. 지혜를 다루는 전7:4절에도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지만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창세기는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다 죽게 되었고, 죽음 이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의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과 부활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믿음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고, 오직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평소에 대충 살다가 죽을 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은 더 자랄까요, 아니면 더 약해질까요? 일반적으로 보면 일단 늙으면 힘이 없고 약하다 보니 하나님 보다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과 세상의학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내가 살만큼 살았으니 특별히 뭐 할게 있겠나, 자녀들에게 짐만 안되도 좋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죽음이 가까울수록 아주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성도들도 야곱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을 정리하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영원하심, 완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려운 고비를 당할 때마다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또 하나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인도하심은 야곱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최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변환경에 인생을 걸지 말고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2. 예배하는 삶
야곱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믿음으로 2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본문 1절 앞에서 ‘이 일 후에’란 말은 창47장 29-31절까지 나오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야곱은 아들 요셉을 불러 자기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게 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메어다가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맹세방식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하던 관습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야곱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여주면서 요셉 너도 앞으로 여기서 묻혀서는 안되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도 죽을 때 자기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후손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거기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었을 때 장사지내지 않고 입관하여 보관해두었다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제일 먼저 메고 나간 것이 요셉의 시신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 후손에게도 그 은혜가 계속 성취되어 가야된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은 남편 야곱을 따르다가 에브랏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라헬은 밧단 아람에서 자기 아버지를 피하여 야곱을 따라 나섰고 세겜에 살다가 벧엘을 거쳐 시아버지가 있는 이삭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재촉하는 바람에 만삭이 된 몸으로 따르다가 도중에 난산을 하고 죽게 되자 에브랏에서 장사했습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요셉에게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하게 행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너는 어머니의 묘소라도 잘 돌보아 드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야곱을 장례하러 가다가 어머니 무덤을 잘 돌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하나님께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도 소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갔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부르시면 가기 전에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세상의 것들을 미리 잘 정리하고 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교훈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죽음을 앞 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 집에서 나와서 형 에서를 만난 후 그 벧엘로 다시 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창35: 11,12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도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애굽으로 오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창 46:4절에 ”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을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17년 전의 언약이므로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이 애굽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17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브엘세바의 그 언약은 400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셉이 엄숙하게 맹세하자 야곱은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창47: 31절에서 ”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히11:21절에서는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해석했습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야곱이 147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였으므로 지팡이를 짚고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기도로 씨름하던 사건 이후로 다리를 저는 신체 장애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하나님께 경배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믿음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요셉의 맹세를 통해 자신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힐 것을 확신하였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성도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요셉 자녀들에 대한 축복
창세기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마지막은 야곱의 세가지 축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축복했고, 그리고 자기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여 축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1-7절까지는 야곱이 왜 가나안에 가서 묻혀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은혜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고, 8-2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를 남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후손들을 축복한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빌어주는 것이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 자기의 마지막 축복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본문 3,4절에 “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자기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고 주신 복을 간증했습니다. 이것이 야곱 인생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복을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복에 머무르지만 성도들은 하늘의 신령한 복까지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가 우리의 본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야곱은 본문 5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키는데 이것이 요셉의 장자권을 잇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유산을 두배나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요셉이 애굽의 제사장 딸을 아내로 맞아 얻은 아들이므로 애굽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두 손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은 먼저 요셉을 축복한 후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했습니다.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두배의 복을 준 것입니다. 땅도 두배나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레위는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분하고 요셉 대신에 그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된 것입니다. 요셉은 두 지파를 이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두 아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를 아버지 오른손 앞에, 그 동생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손 앞에 그 무릎 사이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손을 교차하여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얹고,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어 축복하려고 할 때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 손을 얹은 줄 알고 이야기 하니 야곱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므낫세에게는 차자의 축복을 한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이 창세기 주제인데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1:32절을 보면 열두지파 인구조사를 할 때 에브라임 지파는 40,500명이고 므낫세 지파는 32,200명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이 지난 후 다시 인구조사를 해보니 에브라임 지파는 32,500명이고 므나세 지파는 52,700명으로 므낫세 지파가 더 많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지파가 광야 40년 훈련받는 동안 하나님을 열 번이나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박이나 부추를 맛볼수 없다고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강했으나 광야에서는 훈련을 제대로 감당못하고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강성해져서 나라를 세울 때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따라 축복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녀들에게 축복할 권세와 사명이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은 후손들에게 전수됩니다. 출20: 5,6절에 보면 저주는 3-4대까지 이르지만 복은 천대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잡고 기도하든지 축복기도하십시오. 부모의 축복을 받고 자란 자녀와 욕을 먹고 자란 자녀는 그 미래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자녀가 잘못해서 따끔한 훈육을 할 때에도 자녀들 마음 속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축복 기도해주어야 하지만 교훈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축복만 하고 교훈을 하지 않으면 복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데 아무리 축복해줘도 그 복이 자녀의 그릇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준비된 그릇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교훈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말 할 수 있어야 자녀들이 그 교훈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님이 말씀대로 살았더니 실제로 이런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교훈이 진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생활이나 주일 예배의 중요성 등을 몸소 보여주어야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부모가 본을 보일 때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훈계를 따르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장자도 차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애굽 아내에게서 난 아들도 야곱은 자기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습니다. 세상 질서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 네트워킹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상하관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동역자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려두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애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적으로는 연약해지나 영적으로는 더욱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자신의 일평생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복을 주신 사실을 정확하게 후대들에게 전달해주고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감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참된 믿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붙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야곱처럼 참된 신앙의 유산을 자녀와 후대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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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야곱과 요셉의 장례식 | 창50:1-26 | 2025-08-17 | 홍기칠 목사 |
67 | 야곱의 마지막 축복기도 | 창49:1-33 | 2025-08-10 | 홍기칠 목사 |
66 | 요셉을 위한 야곱의 축복 | 창48:1-22 | 2025-08-03 | 홍기칠 목사 |
65 | 고센 땅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 창47:1-31 | 2025-07-27 | 홍기칠 목사 |
64 | 내가 너와 함께 가겠노라 | 창46:1-34 | 2025-07-20 | 홍기칠 목사 |
63 | 언약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 창45: 16-28 | 2025-07-13 | 홍기칠 목사 |
62 | 요셉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섭리 | 창45:1-15 | 2025-07-06 | 홍기칠 목사 |
61 | 목숨을 건 중보기도 | 창44:1-34 | 2025-06-29 | 홍기칠 목사 |
60 |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 창43:1-34 | 2025-06-22 | 홍기칠 목사 |
59 |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 창42: 18-38 | 2025-06-15 | 홍기칠 목사 |
58 | 숨겨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 창42:1-17 | 2025-06-08 | 홍기칠 목사 |
57 | 요셉을 애굽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 | 창41:37-57 | 2025-06-01 | 홍기칠 목사 |
56 | 바로왕의 꿈을 해석한 요셉 | 창41:1-36 | 2025-05-25 | 홍기칠 목사 |
55 | 요셉의 꿈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뤙 | 창40:1-23 | 2025-05-18 | 홍기칠 목사 |
54 | 믿음으로 시험을 이긴 요셉 | 창39:7-23 | 2025-05-11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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