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목숨을 건 중보기도
2025-06-29 21:01:40
홍기칠
조회수   17
설교본문 창44:1-34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6-29

주일오후예배 설교 250629 목숨을 건 중보기도

본문: 44:1-34

제목: 목숨을 건 중보기도

 

I. 서론

 

지난 주에 창43장을 살펴보면서 요셉의 형제들 12명이 드디어 한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특히 막내 베냐민에게는 음식을 다른 형제보다 다섯배나 더 주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고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잔치를 벌인 후에 그들에게 각자 양식을 자루에 넣으면서 가지고 온 돈을 다시 그 자루에 넣고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가 사용하던 은잔을 넣도록 청지기에게 명합니다. 그들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다가 요셉의 청지기들이 따라가서 자루에 그 은잔이 든 베냐민을 요셉에게 데려오게 됩니다. 그 형들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요셉에게로 와서 베냐민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요셉에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시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하면서도 왜 형들에게 고통을 주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형들에게 내가 바로 20여년 전에 헤어졌던 그 요셉입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을, 병주고 약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형들에게 각 자루에 곡식뿐 아니라 가지고 온 돈도 다시 넣어주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요셉이 사용하던 은잔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요셉의 하인들이 따라가서 그들의 짐을 수색하도록 합니다.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이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무엇이 참 사랑이냐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이, 무조건 용서해주는 것만이 사랑입니까? 물론 그렇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사람입니다. 이 일로 인해 요셉의 형들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성숙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많았던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그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아들로 거듭나고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또한 전에는 배다른 형제들끼지 서루 질투하고 경쟁했지만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놀랍게도 훌륭한 팀워크를 이루어 갔습니다. 서로 보호하고 돕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혔을 때 그들은 시므온을 구하려고 돌아왔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이 들어있는 것이 밝혀졌을 때 베냐민을 보호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이 하나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라도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고 좋은 팀워크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중심의 가족 구조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머리입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십시오, 그리고 배다른 형제라 할지라도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십시오.

 

2.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요셉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3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진정한 사랑은 대상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대상이 누구인지를 따지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과 무관합니다. 나의 사랑이 필요한지가 중요합니다. 둘째,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반응하느냐와 무관하게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거절하면 만나고,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사랑은 세월과 상관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옵니다.이 비유에서 사랑의 속성 3가지가 나옵니다.첫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강도 만났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도와주면 무슨 보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마리아인은 손익계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면서 시간이 얼마나 손해나는지, 돈은 얼마나 드는지, 도와주고 난 후에 오히려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닌지 등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도와준 것 뿐입니다. 셋째, 사마라인은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 현장에서만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주막에 데려가서 이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사랑은 형들에 대한 요셉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에는 왜 갈등이 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나한테 잘 해주는 ᄉᆞᆷ에게만 잘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배신하면 화가나고 갈등이 생깁니다. 사랑을 포기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정성껏 섬기고, 위로하고, 축복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양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눈으로, 얼굴로, 언어로 다 표현됩니다. 숨기지 못합니다.

 

조건적 사랑에서 무조건적 사랑으로, 계산하는 사랑에서 계산하지 않는 사랑으로, 자기 중심적 사랑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사랑으로, 감정적인 사랑에서 의지적인 사랑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사랑이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5:5절에 소망이 우리르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내 사랑은 바닥난 사랑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 사랑을 내게 부어주셔야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최대 메시지는 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참된 중보기도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요셉의 집에서 대연회를 마친 후에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제 시므온과 베냐민도 찾았고 필요한 양식도 얻었으니 아버지 야곱을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전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형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형들만 보내고 베냐민은 애굽에 남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역시 자신의 충실한 청지기를 통해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모든 형제들의 자루에 양식을 채우고 돈도 채운 후에 베냐민의 자루에는 내 잔 곧 은잔을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잔은 분명히 요셉이 형들과 연회를 즐길 때 보여 주었던 잔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둔 잔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아는 잔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자루에 그 은잔이 발견되면 자루의 주인은 그 잔이 탐이 나서 훔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출발하자 청지기를 보내서 그들을 수색하도록 합니다. 청지기가 도착하여 어찌 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고 하면서 은잔을 훔쳐간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이때 영문을 전혀 몰랐던 형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모죄를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결단코 도둑질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두가지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요셉에게 제공 돈도 가나안 땅에서 가져온 돈인데 어떻게 주인의 집 물건을 도적질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잔이 발견되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하고, 자신들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 청지기는 그 은잔이 발견되면 그는 우리의 종이 될 것이요 너희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둘 사이의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무죄를 확신했기 때문에 급히 자루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슬픔에 잠겨 옷을 찢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셉이 죽었다고했을 때 야곱이 옷을 찢었듯이 이제 형제들은 베냐민이 죽게 되었다는 생각에 옷을 찢은 것입니다. 청지기는 베냐민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 형들은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종의 말을 듣지 않고 함께 요셉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 은잔이 발견되었을 때 이제는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책임을 떠 넘긴다면 그 중에 한두명은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한몸처럼 움직였습니다.

 

요셉은 화난 목소리로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말했습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에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옛 죄악을 드러내셨다고 확신했습니다. 유다는 이미 38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옛죄악에 대해 심판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고 해도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의 훈련을 통해 요셉의 형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다가 그렇게 말하자 요셉은 그 잔이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 너희들은 평안히 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약속과 원칙에 충실한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단호한 결정에 이제 베냐민과 함께 종이 되는 것도 불가능해졌습니다. 만약 이때 그 형들이 돌이킬 수 없다고 다 돌아가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요셉을 은 20에 팔아넘겼듯이 이제 베냐민을 노예로 팔면 자기들은 자유로워질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형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재판장인 요셉에게 자비를 호소하는 것 뿐입니다. 드디어 유다가 요셉앞에 가서 호소합니다. 길게 말했지만 요점는 본문 33-34절에 있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데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라고 베냐민 대신 자기가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베냐민을 돌려 보내달라고 호소합니다,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영원히 죄를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야곱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말의 핵심은 베냐민의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말이 맞다면 요셉은 더 이상 베냐민을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도 배냐민이 없이는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다는 자기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베냐민을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베냐민을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생명이 위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은 형들의 사랑입니다. 요셉의 치밀한 계획으로 형들은 자신도 모르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잘못해서 빠진 것이 아니라 요셉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친 그물에 빠져나올 수 가 없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잘못할 것이 없는데 자루를 열어보니 은잔과 돈이 거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고 할말이 없지만, 마음속에서 이게 아닌데, 난 잘못한 것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정직이 통하지 않고 음모가 가득한 세상아닙니까? 요셉의 형들도 이러한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필 그렇게 보호하려고 했던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거쇼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억울하게 당했는데 벗어날 힘도 변명할 방법도 없을 때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이때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게 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면서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형들의 마음에는 이제 포기만 남았습니다.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정직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오래 전 형들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전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성격은 신앙의 틀입니다. 성격이 변하지 않으면 무엇을 집어넣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어쩔 수 없는 기막힌 상황에 처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유다는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는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 잔이 발견된 사람과 함께 고난을 당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형들은 예전의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공동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유다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늙은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만 살 궁리를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또 다시 아버지 가슴에 못박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야곱에서서 1`2명의 아들들이 나게 하셔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변하기 전 이들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제대로 된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고 살인하는 등 형편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변화시켜서 12지파의 조상이 될 만한 인격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특별히 유다는 예수님의 족보와 직접 연관이 있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과거에 미숙할 때는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과거와 상관없이 변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실수가 많고, 미숙하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해도 하나님은 나를 조금씩 회복시키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하십니다. 이것이요셉의 형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메시지입니다.

 

유다는 이제 내가 죽더라고 베냐민은 돌려보내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애원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번 다시 동일한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자기 생명을 내주는 목숨을 건 청원을 한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메마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을 바꾸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바꾸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걸고하는 중보기도를 하십시오. 우리는 대가가 없고 손해보지 않는 중보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시간내서 만나주고 기도해주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된 유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라고 중보기도를 마지막 순간까지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기도에도 나타납니다. “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하나님께 의인 50,45, 30, 20명 끝내는 10명이라도 있으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한 중보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매달려서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데 주께서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으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했습니다.

 

중보기도는 명상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십자가를 붙들고 순교하는 심정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가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유다에게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제 생명을 거우어 주옵소서라는 중보기도를 한다면 이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그 정도까지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조금씩 시작해 봅시다.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오늘부터 중보기도를 유다와 같은 마음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에도 유다처럼 목숨을 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목숨을 거는 중보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살거나 나 자신과 내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안의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따라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유다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애타가 중보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빚진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유다처럼 예수 생명, 예수 능력을 증거하는 중보기도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일오후예배 설교 250629 목숨을 건 중보기도

본문: 44:1-34

제목: 목숨을 건 중보기도

 

I. 서론

 

지난 주에 창43장을 살펴보면서 요셉의 형제들 12명이 드디어 한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특히 막내 베냐민에게는 음식을 다른 형제보다 다섯배나 더 주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고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잔치를 벌인 후에 그들에게 각자 양식을 자루에 넣으면서 가지고 온 돈을 다시 그 자루에 넣고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가 사용하던 은잔을 넣도록 청지기에게 명합니다. 그들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다가 요셉의 청지기들이 따라가서 자루에 그 은잔이 든 베냐민을 요셉에게 데려오게 됩니다. 그 형들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요셉에게로 와서 베냐민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요셉에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시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하면서도 왜 형들에게 고통을 주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 형들에게 내가 바로 20여년 전에 헤어졌던 그 요셉입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을, 병주고 약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형들에게 각 자루에 곡식뿐 아니라 가지고 온 돈도 다시 넣어주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요셉이 사용하던 은잔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요셉의 하인들이 따라가서 그들의 짐을 수색하도록 합니다.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이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무엇이 참 사랑이냐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이, 무조건 용서해주는 것만이 사랑입니까? 물론 그렇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사람입니다. 이 일로 인해 요셉의 형들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성숙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많았던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그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아들로 거듭나고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또한 전에는 배다른 형제들끼지 서루 질투하고 경쟁했지만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놀랍게도 훌륭한 팀워크를 이루어 갔습니다. 서로 보호하고 돕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인질로 잡혔을 때 그들은 시므온을 구하려고 돌아왔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이 들어있는 것이 밝혀졌을 때 베냐민을 보호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이 하나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라도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고 좋은 팀워크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중심의 가족 구조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머리입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십시오, 그리고 배다른 형제라 할지라도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십시오.

 

2.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어야 진정한 사랑이다.

요셉을 보면서 사랑에 대한 3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진정한 사랑은 대상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대상이 누구인지를 따지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과 무관합니다. 나의 사랑이 필요한지가 중요합니다. 둘째,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반응하느냐와 무관하게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거절하면 만나고,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사랑은 세월과 상관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옵니다.이 비유에서 사랑의 속성 3가지가 나옵니다.첫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강도 만났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도와주면 무슨 보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사마리아인은 손익계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면서 시간이 얼마나 손해나는지, 돈은 얼마나 드는지, 도와주고 난 후에 오히려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닌지 등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도와준 것 뿐입니다. 셋째, 사마라인은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 현장에서만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주막에 데려가서 이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사랑은 형들에 대한 요셉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에는 왜 갈등이 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나한테 잘 해주는 ᄉᆞᆷ에게만 잘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배신하면 화가나고 갈등이 생깁니다. 사랑을 포기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정성껏 섬기고, 위로하고, 축복하십시오.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양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눈으로, 얼굴로, 언어로 다 표현됩니다. 숨기지 못합니다.

 

조건적 사랑에서 무조건적 사랑으로, 계산하는 사랑에서 계산하지 않는 사랑으로, 자기 중심적 사랑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사랑으로, 감정적인 사랑에서 의지적인 사랑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사랑이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5:5절에 소망이 우리르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내 사랑은 바닥난 사랑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 사랑을 내게 부어주셔야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최대 메시지는 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참된 중보기도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요셉의 집에서 대연회를 마친 후에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제 시므온과 베냐민도 찾았고 필요한 양식도 얻었으니 아버지 야곱을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전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형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형들만 보내고 베냐민은 애굽에 남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역시 자신의 충실한 청지기를 통해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모든 형제들의 자루에 양식을 채우고 돈도 채운 후에 베냐민의 자루에는 내 잔 곧 은잔을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잔은 분명히 요셉이 형들과 연회를 즐길 때 보여 주었던 잔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요셉이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둔 잔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아는 잔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자루에 그 은잔이 발견되면 자루의 주인은 그 잔이 탐이 나서 훔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출발하자 청지기를 보내서 그들을 수색하도록 합니다. 청지기가 도착하여 어찌 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고 하면서 은잔을 훔쳐간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이때 영문을 전혀 몰랐던 형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모죄를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결단코 도둑질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두가지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요셉에게 제공 돈도 가나안 땅에서 가져온 돈인데 어떻게 주인의 집 물건을 도적질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잔이 발견되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하고, 자신들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 청지기는 그 은잔이 발견되면 그는 우리의 종이 될 것이요 너희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둘 사이의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무죄를 확신했기 때문에 급히 자루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슬픔에 잠겨 옷을 찢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셉이 죽었다고했을 때 야곱이 옷을 찢었듯이 이제 형제들은 베냐민이 죽게 되었다는 생각에 옷을 찢은 것입니다. 청지기는 베냐민만 데리고 가고 나머지 형들은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종의 말을 듣지 않고 함께 요셉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 은잔이 발견되었을 때 이제는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책임을 떠 넘긴다면 그 중에 한두명은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한몸처럼 움직였습니다.

 

요셉은 화난 목소리로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말했습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에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옛 죄악을 드러내셨다고 확신했습니다. 유다는 이미 38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옛죄악에 대해 심판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고 해도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동안의 훈련을 통해 요셉의 형들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다가 그렇게 말하자 요셉은 그 잔이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 너희들은 평안히 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약속과 원칙에 충실한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단호한 결정에 이제 베냐민과 함께 종이 되는 것도 불가능해졌습니다. 만약 이때 그 형들이 돌이킬 수 없다고 다 돌아가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요셉을 은 20에 팔아넘겼듯이 이제 베냐민을 노예로 팔면 자기들은 자유로워질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형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재판장인 요셉에게 자비를 호소하는 것 뿐입니다. 드디어 유다가 요셉앞에 가서 호소합니다. 길게 말했지만 요점는 본문 33-34절에 있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데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라고 베냐민 대신 자기가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베냐민을 돌려 보내달라고 호소합니다,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영원히 죄를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야곱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말의 핵심은 베냐민의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말이 맞다면 요셉은 더 이상 베냐민을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도 배냐민이 없이는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다는 자기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베냐민을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베냐민을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생명이 위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은 형들의 사랑입니다. 요셉의 치밀한 계획으로 형들은 자신도 모르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형들이 잘못해서 빠진 것이 아니라 요셉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친 그물에 빠져나올 수 가 없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잘못할 것이 없는데 자루를 열어보니 은잔과 돈이 거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고 할말이 없지만, 마음속에서 이게 아닌데, 난 잘못한 것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정직이 통하지 않고 음모가 가득한 세상아닙니까? 요셉의 형들도 이러한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필 그렇게 보호하려고 했던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거쇼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억울하게 당했는데 벗어날 힘도 변명할 방법도 없을 때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이때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게 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면서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형들의 마음에는 이제 포기만 남았습니다.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정직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오래 전 형들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전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성격은 신앙의 틀입니다. 성격이 변하지 않으면 무엇을 집어넣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어쩔 수 없는 기막힌 상황에 처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유다는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는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 잔이 발견된 사람과 함께 고난을 당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형들은 예전의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공동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유다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늙은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만 살 궁리를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또 다시 아버지 가슴에 못박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야곱에서서 1`2명의 아들들이 나게 하셔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변하기 전 이들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제대로 된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고 살인하는 등 형편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변화시켜서 12지파의 조상이 될 만한 인격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특별히 유다는 예수님의 족보와 직접 연관이 있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과거에 미숙할 때는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과거와 상관없이 변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실수가 많고, 미숙하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해도 하나님은 나를 조금씩 회복시키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하십니다. 이것이요셉의 형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메시지입니다.

 

유다는 이제 내가 죽더라고 베냐민은 돌려보내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애원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번 다시 동일한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자기 생명을 내주는 목숨을 건 청원을 한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메마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을 바꾸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바꾸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걸고하는 중보기도를 하십시오. 우리는 대가가 없고 손해보지 않는 중보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시간내서 만나주고 기도해주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된 유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라고 중보기도를 마지막 순간까지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기도에도 나타납니다. “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하나님께 의인 50,45, 30, 20명 끝내는 10명이라도 있으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한 중보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매달려서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데 주께서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으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했습니다.

 

중보기도는 명상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십자가를 붙들고 순교하는 심정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가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유다에게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제 생명을 거우어 주옵소서라는 중보기도를 한다면 이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처음부터 그 정도까지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조금씩 시작해 봅시다.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오늘부터 중보기도를 유다와 같은 마음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에도 유다처럼 목숨을 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목숨을 거는 중보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살거나 나 자신과 내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안의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따라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유다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애타가 중보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빚진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유다처럼 예수 생명, 예수 능력을 증거하는 중보기도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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