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설교본문 | 창42:1-17 |
---|---|
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6-08 |
주일 오후설교 250608 숨겨 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본문: 창42: 1-17
제목: 숨겨 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I. 서론
요셉이 총리가 된 후 바로왕의 꿈에 계시된 대로 7년 대풍년이 왔습니다. 요셉은 창고를 지었고 수많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이어서 7년 흉년이 왔습니다. 훙년이 오자말자 요셉은 창고를 열어 애굽 사람들에게 준비한 양식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흉년이라해도 준비된 사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아닙니다. 재앙은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겪는 것입니다. 기근은 주변 모든 나라에도 동일하게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도 극심한 기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을 걸고 이방나라인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드디어 요셉과 그 형들이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 곡식을 사러 온 요셉의 형들과 풀어야 할 숙제
창41:57절에 보면 “ 각국 백성들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시직됩니다. 그냥 생각한다면 흉년이 든 기근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건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때문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무서운 기근을 요셉과 형들이 만나는 기회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형들이 그토록 잊어버리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나 형들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의 열명 아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단지 숨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도박을 하다가 중독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심한 기근으로 겪는 고통에 떠밀려 어쩔수 없이 양식을 얻으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사람이 야곱의 아들 열두명 중에 열명만 갔습니다. 요셉은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마저 잃을까 걱정되었기에 애굽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통해 요셉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7절에 보니 “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라고 요셉에게 보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명의 형들이 요셉에게 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습니다. 17세 소년 요셉이 그 전에 꾼 꿈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것입니다. 2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했을 때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기억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자신이 당한 만큼 갚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꾼 꿈, 즉 하나님의 언약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20여년만에 형들이 자기와 만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그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에게 절함으로써 이제 요셉은 형들의 왕이 된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의 진정한 왕이되어 온전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예전에 지은 죄를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과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무력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마자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기와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먼저 요셉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형들에게 당한 배신입니다. 요셉은 의인이요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일들을 다 용서하고 잊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 문제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만나서 서로 화해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요셉의 형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요셉에 대해 모르는 척, 잊은 척하고 살아왔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판 사건에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죄는 세월이 간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죄책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두가지 큰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첫째는 억울한 누명과 고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은 정말 억울한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의 노예로 살았을 뿐 아니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기가 막힌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인이라고 판명이 났고 소문도 퍼졌습니다. 요셉에게는 “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이런 누명을 덮어쓴채 수치스럽게 살도록 하시는가?”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숙제는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요셉은 왕 앞에 나가서 그의 꿈을 해석하고 해결방안을 제안했을 때 그를 애굽총리로 발탁된 것입니다. 요셉은 영광을 얻었고, 가정을 가져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또 다른 숙제는 형들을 어떻게 용서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을 일방적으로 용서했지만 아직 형들을 만나서 화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번째 숙제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방법은 형들을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요셉에게 남은 화해의 문제, 형들에게 있는 죄책감은 둘 다 관계와 얽힌 문제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양자가 만나야 풀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용서를 하고 싶지만 잘 안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혹은 마음으로는 용서했을지라도 화해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용서하지 못해 생긴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고통스런 세월을 보낸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형 에서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눈물과 고통과 한숨으로 지냈습니까? 그러나 야곱의 경우는 요셉과 달리 그가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형에게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는 형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간 신세였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두려움, 무서움, 불안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고통은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겨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지 않고는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형 에서를 만나러 길을 떠났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 평강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형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큰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얍복강가에서 만나주셨습니다. 드디어 형 에서를 만났습니다. 형을 만나자 야곱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 얼굴과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형은 아우를 얼싸안았습니다. 그리고 화해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야곱은 그 무거운 짐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형들이 요셉에게 잘못을 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을 찾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기근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왔다가 뜻밖에 요셉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상식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내가 왜 이 여자를 만났는지,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났는지, 그리고 왜 이 자녀들을 만났는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 우리 집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 예수 믿는 여자가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싸우고 분란을 일으키더니 드디어 가족이 복음을 알고 예수 믿게 되었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알고 나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나온 고통의 세월이 이해되어 집니다.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그때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만나러 오는지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작은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진과 기근과 전쟁을 이용하시기도 하고, 모든 재앙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6.25 한국 전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도 있고, 사업실패로 인해 절망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건 자체는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을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넣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판 후에 죄책감을 가지고 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이 문제를 피하고 싶어서 잊어버리려고 한 것처럼,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고 싶어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이 매일 밤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웬지 모르게 불안합니다. 결혼도 했고, 자녀도 있고, 생활도 안정되었는데도 고독합니다.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뭐 그리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독할까? 왜 이렇게 불안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요셉의 형들을 요셉에게 데리고 간 것처럼, 어느날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몰랐습니다. 바로 눈 앞에 요셉이 있었지만 그 형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내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의 구세주 예수님이 계시지만 몰랐던 것입니다. 이 두가지 상황이 얼마나 비슷한지 모릅니다.
창42:8절에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금방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금방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뿐입니다. 그러면 왜 요셉은 형들을 모른체 했을까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 형님들! “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누군지 이야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형들을 혼내주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이 행동에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2.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
만약 요셉이 그 자리에서 형들을 아는 체 하고 자신의 실체를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회개하기도 전에 요셉이 ” 형님들 제가 다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아마 형들은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용서했다는 요셉의 말을 믿지 않고 ‘저 놈이 언제 우리에게 보복할지 모른다”라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에게 눈물흘리며 고마워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형들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아는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와 참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고난을 전혀 주시지 않고 모든 복을 부어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참회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고난을 통해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반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과정을 만드십니다. 이 비밀을 알지못하면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시나, 빨리 해결해 주시지 않고”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회개를 다 했다고 생각됩니까? 혹은 회개를 했는지 안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는 아닙니까? 요셉은 형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용서했지만 형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형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 형들은 정탐꾼이 아님을 적극 변명하면서 집안 내력을 요셉앞에 소상하게 이야기 하게 됩니다. 고난을 겪으면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본문 14-17절을 보면 요셉은 “형제가 12명이라면서 하나는 없어졌고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집에 있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라고 형들을 압박합니다. 집에 남아 있다는 한 형제를 데리고 오면 내가 믿겠지만 그 형제를 데리고 오지못하면 모두 돌아갈 수 없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갈수록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 잊었던 동생 이야기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토해내게 됩니다. 애굽총리가 자기들을 정탐꾼으로 의심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요셉에 관한 비밀을 들추어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숨겨놓은 죄악들을 하나씩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적 치유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숨겨진 죄를, 말하고 싶지 않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들추어 내어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치유되는 기회가 됩니다. 얼렁뚱땅 슬쩍 넘어간다고 하나님이 모르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는데 내 영혼에 자유와 기쁨과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숨겨둔 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죄가 마음 깊은 곳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완전히 해결 받아야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 깊이 숨겨둔 죄를 다 토해내기 전까지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형들이 다 고백하고 벌거벗고 난 뒤에야 요셉은 자신이 누군인지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형들을 모른체 하며 네 번이나 정탐꾼으로 몬 요셉의 태도는 비정하고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에게 껍데기 뿐인 평화나 형식상의 화해가 아니라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참된 용서가 무엇인지 형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형들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자유를 체험하게 하려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 형들을 만지시고, 숨은 죄악을 토해내게 하시고, 잊고 싶은 과거를 회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을 씻으시고, 깨끗게 하시기 위해 다시 만져 주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미래에 용서하실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 아 나는 구원받았다,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하고 끝내면 안됩니다. 내 속에 있는 뿌리 깊은 죄악을 뽑아내야 합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모든 죄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드러내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와 구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시간이 지나면 또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죄를 드러내는 과정은 진정한 참회, 진정한 용서, 진정한 감격,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남아있는 죄를, 나의 과거를 깊이 참회하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 참회와 고백이 얼마나 깊으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죄를 드러내어 회개하게 해달라고,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셉과 형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형들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내고 회개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시지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회개하며 주님이 주시는 참된 용서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 오후설교 250608 숨겨 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본문: 창42: 1-17
제목: 숨겨 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I. 서론
요셉이 총리가 된 후 바로왕의 꿈에 계시된 대로 7년 대풍년이 왔습니다. 요셉은 창고를 지었고 수많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이어서 7년 흉년이 왔습니다. 훙년이 오자말자 요셉은 창고를 열어 애굽 사람들에게 준비한 양식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흉년이라해도 준비된 사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아닙니다. 재앙은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겪는 것입니다. 기근은 주변 모든 나라에도 동일하게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도 극심한 기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을 걸고 이방나라인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드디어 요셉과 그 형들이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본론
1. 곡식을 사러 온 요셉의 형들과 풀어야 할 숙제
창41:57절에 보면 “ 각국 백성들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시직됩니다. 그냥 생각한다면 흉년이 든 기근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건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때문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무서운 기근을 요셉과 형들이 만나는 기회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형들이 그토록 잊어버리고 싶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나 형들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의 열명 아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잊은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단지 숨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도박을 하다가 중독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심한 기근으로 겪는 고통에 떠밀려 어쩔수 없이 양식을 얻으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사람이 야곱의 아들 열두명 중에 열명만 갔습니다. 요셉은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마저 잃을까 걱정되었기에 애굽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통해 요셉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7절에 보니 “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라고 요셉에게 보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명의 형들이 요셉에게 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습니다. 17세 소년 요셉이 그 전에 꾼 꿈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것입니다. 2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을 했을 때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기억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자신이 당한 만큼 갚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꾼 꿈, 즉 하나님의 언약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20여년만에 형들이 자기와 만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그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에게 절함으로써 이제 요셉은 형들의 왕이 된 것입니다. 요셉이 그들의 진정한 왕이되어 온전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예전에 지은 죄를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과 화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무력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마자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기와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먼저 요셉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형들에게 당한 배신입니다. 요셉은 의인이요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일들을 다 용서하고 잊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 문제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만나서 서로 화해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요셉의 형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요셉에 대해 모르는 척, 잊은 척하고 살아왔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판 사건에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죄는 세월이 간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죄책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두가지 큰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첫째는 억울한 누명과 고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은 정말 억울한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의 노예로 살았을 뿐 아니라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기가 막힌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인이라고 판명이 났고 소문도 퍼졌습니다. 요셉에게는 “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이런 누명을 덮어쓴채 수치스럽게 살도록 하시는가?”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숙제는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요셉은 왕 앞에 나가서 그의 꿈을 해석하고 해결방안을 제안했을 때 그를 애굽총리로 발탁된 것입니다. 요셉은 영광을 얻었고, 가정을 가져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또 다른 숙제는 형들을 어떻게 용서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을 일방적으로 용서했지만 아직 형들을 만나서 화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두 번째 숙제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방법은 형들을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요셉에게 남은 화해의 문제, 형들에게 있는 죄책감은 둘 다 관계와 얽힌 문제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양자가 만나야 풀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용서를 하고 싶지만 잘 안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혹은 마음으로는 용서했을지라도 화해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용서하지 못해 생긴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고통스런 세월을 보낸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 형 에서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눈물과 고통과 한숨으로 지냈습니까? 그러나 야곱의 경우는 요셉과 달리 그가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형에게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는 형에게 사기를 치고 도망간 신세였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두려움, 무서움, 불안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고통은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겨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야곱은 형을 만나지 않고는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형 에서를 만나러 길을 떠났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 평강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형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큰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얍복강가에서 만나주셨습니다. 드디어 형 에서를 만났습니다. 형을 만나자 야곱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 얼굴과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형은 아우를 얼싸안았습니다. 그리고 화해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야곱은 그 무거운 짐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형들이 요셉에게 잘못을 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을 찾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기근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왔다가 뜻밖에 요셉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상식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내가 왜 이 여자를 만났는지, 내가 왜 이 남자를 만났는지, 그리고 왜 이 자녀들을 만났는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지 않으면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 우리 집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 예수 믿는 여자가 시집와서 시어머니와 싸우고 분란을 일으키더니 드디어 가족이 복음을 알고 예수 믿게 되었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알고 나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나온 고통의 세월이 이해되어 집니다.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그때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만나러 오는지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작은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진과 기근과 전쟁을 이용하시기도 하고, 모든 재앙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6.25 한국 전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도 있고, 사업실패로 인해 절망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건 자체는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을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넣고 애굽으로 가는 상인에게 판 후에 죄책감을 가지고 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이 문제를 피하고 싶어서 잊어버리려고 한 것처럼,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고 싶어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이 매일 밤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웬지 모르게 불안합니다. 결혼도 했고, 자녀도 있고, 생활도 안정되었는데도 고독합니다.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뭐 그리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독할까? 왜 이렇게 불안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 요셉의 형들을 요셉에게 데리고 간 것처럼, 어느날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몰랐습니다. 바로 눈 앞에 요셉이 있었지만 그 형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내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의 구세주 예수님이 계시지만 몰랐던 것입니다. 이 두가지 상황이 얼마나 비슷한지 모릅니다.
창42:8절에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금방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금방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뿐입니다. 그러면 왜 요셉은 형들을 모른체 했을까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 형님들! “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누군지 이야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형들을 혼내주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이 행동에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2.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
만약 요셉이 그 자리에서 형들을 아는 체 하고 자신의 실체를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회개하기도 전에 요셉이 ” 형님들 제가 다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아마 형들은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용서했다는 요셉의 말을 믿지 않고 ‘저 놈이 언제 우리에게 보복할지 모른다”라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에게 눈물흘리며 고마워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형들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아는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와 참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고난을 전혀 주시지 않고 모든 복을 부어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참회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고난을 통해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반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과정을 만드십니다. 이 비밀을 알지못하면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시나, 빨리 해결해 주시지 않고”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회개를 다 했다고 생각됩니까? 혹은 회개를 했는지 안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는 아닙니까? 요셉은 형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용서했지만 형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형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 형들은 정탐꾼이 아님을 적극 변명하면서 집안 내력을 요셉앞에 소상하게 이야기 하게 됩니다. 고난을 겪으면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본문 14-17절을 보면 요셉은 “형제가 12명이라면서 하나는 없어졌고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집에 있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라고 형들을 압박합니다. 집에 남아 있다는 한 형제를 데리고 오면 내가 믿겠지만 그 형제를 데리고 오지못하면 모두 돌아갈 수 없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갈수록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 잊었던 동생 이야기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토해내게 됩니다. 애굽총리가 자기들을 정탐꾼으로 의심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요셉에 관한 비밀을 들추어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숨겨놓은 죄악들을 하나씩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적 치유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숨겨진 죄를, 말하고 싶지 않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씩 들추어 내어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치유되는 기회가 됩니다. 얼렁뚱땅 슬쩍 넘어간다고 하나님이 모르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는데 내 영혼에 자유와 기쁨과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숨겨둔 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죄가 마음 깊은 곳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완전히 해결 받아야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 깊이 숨겨둔 죄를 다 토해내기 전까지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형들이 다 고백하고 벌거벗고 난 뒤에야 요셉은 자신이 누군인지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형들을 모른체 하며 네 번이나 정탐꾼으로 몬 요셉의 태도는 비정하고 잔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에게 껍데기 뿐인 평화나 형식상의 화해가 아니라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참된 용서가 무엇인지 형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형들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자유를 체험하게 하려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 형들을 만지시고, 숨은 죄악을 토해내게 하시고, 잊고 싶은 과거를 회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을 씻으시고, 깨끗게 하시기 위해 다시 만져 주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미래에 용서하실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 아 나는 구원받았다,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하고 끝내면 안됩니다. 내 속에 있는 뿌리 깊은 죄악을 뽑아내야 합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모든 죄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드러내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와 구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시간이 지나면 또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죄를 드러내는 과정은 진정한 참회, 진정한 용서, 진정한 감격,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남아있는 죄를, 나의 과거를 깊이 참회하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그 참회와 고백이 얼마나 깊으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죄를 드러내어 회개하게 해달라고,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셉과 형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형들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내고 회개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시지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회개하며 주님이 주시는 참된 용서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
62 | 요셉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섭리 | 창45:1-15 | 2025-07-06 | 홍기칠 목사 |
61 | 목숨을 건 중보기도 | 창44:1-34 | 2025-06-29 | 홍기칠 목사 |
60 | 진퇴양난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 | 창43:1-34 | 2025-06-22 | 홍기칠 목사 |
59 |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 창42: 18-38 | 2025-06-15 | 홍기칠 목사 |
58 | 숨겨둔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 창42:1-17 | 2025-06-08 | 홍기칠 목사 |
57 | 요셉을 애굽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 | 창41:37-57 | 2025-06-01 | 홍기칠 목사 |
56 | 바로왕의 꿈을 해석한 요셉 | 창41:1-36 | 2025-05-25 | 홍기칠 목사 |
55 | 요셉의 꿈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뤙 | 창40:1-23 | 2025-05-18 | 홍기칠 목사 |
54 | 믿음으로 시험을 이긴 요셉 | 창39:7-23 | 2025-05-11 | 홍기칠 목사 |
53 | 복의 통로가 된 요셉 | 창39:1-6 | 2025-05-04 | 홍기칠 목사 |
52 | 다말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 창38:1-30 | 2025-04-27 | 홍기칠 목사 |
51 |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 창32: 12-36 | 2025-04-13 | 홍기칠 목사 |
50 | 요셉의 꿈 | 창37:1-11 | 2025-04-06 | 홍기칠 목사 |
49 | 에서의 후손 | 창36: 1-43 | 2025-03-30 | 홍기칠 목사 |
48 | 20250316 주일오후설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창35: 1-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