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2025-06-19 15:19:30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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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창42: 18-38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6-15

주일오후설교 250615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본문: 42: 18-38

제목: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I. 서론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7년간 풍년 때에 창고를 지어 곡식을 잘 보관하였다가 이어서 온 7년간의 흉년때에 애굽백성들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곡식을 사러 왔을 때 그들에게 곡식을 판매했습니다. 그 중에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야곱의 아들들이 드디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 10명을 당장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애굽을 엿보러 온 정탐꾼이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가족사를 이야기 합니다. 12명의 야곱의 아들들 중에 한 사람은 없어졌고 막내아들 베냐민은 아버지와 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요셉은 그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려면 너희 중 한사람을 보내어 그 아우를 데려오고 나머지는 갇혀 있으라고 하면서 사흘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뒷이야기가 계속되는데 요셉을 통해 그 형제들을 회개시키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만날 사람을 만나야 행복해진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 떠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외로움과 불안, 두려움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능력도, 찾아 갈 수 있는 길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야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습니다. 모든 불안, 염려, 외로움이 변하여 감격과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 화해하기 전에는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요셉도 자기를 배신한 형들을 만나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 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이 그를 배신한 형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근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하나님은 그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축복이나 고난도 모두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다 하나님의 섭리이며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8: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고통, 저주, 손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모든 저주와 고통조차 축 복으로 승화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생애 자체가 복이요, 우리가 겪는 고난조차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드디어 요셉은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가나안 땅에 사는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고난속에서도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역사하면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기근 때문에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와서 요셉총리 앞에 엎드려 절을 하게 됩니다. 요셉이 17세에 꾼 꿈이 실제로 성취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들이 애굽 상인에게 팔았던 동생 요셉이 바로 그들 앞에 애굽총리로 서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22년의 세월을 흘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보지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만지실 때 들을 수 있는 귀와 느낄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자신이 꾼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나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당장 드러내지 않고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였습니다. 429,12,14,16절에서 네 번이나 집요하게 형들을 밀어붙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 막내동생을 데려온다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난처해졌습니다. 형들은 그 말을 아버지 야곱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가족 내부문제를 애굽총리인 요셉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처럼 정확하고 결정적인 정곡을 찌르는 문제를 던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이 가서 막내동생을 데려오면 믿어주겠다고 해놓고 사흘동안 형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요셉이 형들의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테스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테스트하려고 한 것은 과연 베냐민을 자신들의 진정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3일 지나고 나서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라고 했습니다. 형들에게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힌트를 준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므로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지금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걷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본문 18절에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했습니다. 19-20절에 보면 한명만 보내고 나머지는 감옥에 가두어 두려던 계획을 바꾸어서 반대로 한명만 감옥에 남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식구들의 굶주림을 면하도록 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니 그 중에 시므온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므온이 대신 인질로 잡힌 것입니다. 이제 시므온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는 것 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이 베냐민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형들의 마음을 고치려고 했던 이유였습니다. 이전에 형들은 요셉 하나 쯤이야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베냐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만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베냐민의 미래도 상당히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존망이 베냐민의 안녕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여기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요셉의 조치로 형들은 이제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하는 사명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일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기억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라고 후회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22년 전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넣었을 때 요셉이 형들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는데 그것을 외면했던 과거를 지금 자기들이 당한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딜렘마에 빠질수록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죄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진땀나는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숨어 있는 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해결받고 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미움, 분노, 한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복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형들이 고난당한 이유를 세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형들은 요셉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요셉사건은 영원히 묻혀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깊어지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끝나고 맙니다.

 

둘째,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것이 범죄라고 고백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복의 시작입니다. 반면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을 자기들끼리 스스로 이야기 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요셉의 형들은 현재 자신들이 받고 있는 고난이 과거에 요셉이 당한 고통을 되돌려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일이 막히고 잘 안될 때 그 배후에 영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일이 없습니까? 가해자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준 고통이나 상처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받은 상처를 오래 기억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면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들이 받은 고난의 이유입니다. 기근이 있고, 정탐꾼으로 몰리고, 감옥에서 사흘동안 갇히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와야 하는 난제를 만남으로써 요셉의 형들이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참회와 회개의 복입니다. 만일 그때 요셉이 형들을 미리 아는 체 했다면 이 문제는 묻히고 말았거나 피상적인 해결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최대위기가 바로 이 피상성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깊이가 없고 감정적이고 신뢰성이 없는 피상적인 신앙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회개의 깊이는 신앙의 깊이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서운 죄악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지 않고 단지 몇마디로 끝내버리는 데 그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성범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남편 우리아 장군을 적진 가장 앞으로 나가 싸우도록 하여 결국 전사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이러한 자기 죄를 지적하자 통회자복하며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32:1-4절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서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죄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다윗은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손이 밤낮으로 자기를 누르고 있어서 뼈가 녹고 혈액과 수액으로 된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뼈가 쇠하도록 피가 마르도록 그는 철저히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깊이 묵상하다가 51: 5절 말씀처럼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 가운데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과 뿌리까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오늘 본문 22절로 돌아오면 루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 것을 보고 형들에 대한 한이 많이 풀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그들을 떠나 혼자 실컷 울고 나왔습니다.

 

여기서 피값이란 말이 나옵니다. 진짜 피값을 치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우리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루우벤은 지금 자기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때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요셉을 사지로 몰았던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냐고 후회하면서 형제들에게 원망을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자 형들은 자신들의 과거 요셉에게 행한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을 요셉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통역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나님이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앉고 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24-25절에 보면 요셉은 그들의 말을 듣고 혼자 들어가 울고 나와서 그들 중에 시므온을 그들 앞에서 결박하여 데려가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곡물을 자루에 채워주고 각 사람이 곡식사러 가지고 온 돈도 도로 그들 자루에 넣도록 하인들에게 시킵니다.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만 겉으로는 형들을 아주 엄하게 다룹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엄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마치 잘못한 아이를 다루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다루실 때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아시지만 스스로 깊은 참회를 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버리고 성숙한 신앙인격체로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뒤돌아 서서 우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이 눈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진심과는 달리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형들에게는 곡식을 잔뜩 자루에 넣어주고 돈도 도로 주었으며 길 가다가 먹을 음식까지 챙겨주었습니다. 형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돌아가는 길에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다가 자루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본문 28절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점점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가 자기들이 겪은 일을 소상하게 아버지 야곱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자기들이 정탐꾼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음을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랐고, 자루에 든 돈뭉치를 보고 더 놀라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야곱은 요셉과 시므온도 없어졌고, 이제 베냐민도 빼앗아 가고자 한다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루우벤이 시므온과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자기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하면서 반드시 그들을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맹세를 하며 아버지를 안심시키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야곱이 영적 안목이 전혀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 계획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자기 아들을 잃을 것을 생각하고 또 다른 아들을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만나게 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인데 야곱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지 못하고 단지 자기와 아들에 대한 육신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낙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지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복된 사건입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믿음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사건이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복으로 변합니다.

 

지금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을 고통으로 해석하고 있고 막내아들 베냐민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인간적인 공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시는 것은 베냐민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베냐민을 통해 야곱의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야곱이 요셉과 재회하게 하시고 그들을 영광의 자리에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형들에게 고백하였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메어있었다면 형들에 대한 보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들을 무조건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용서는 자칫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위험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의 통치자로 세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크게 손상된 이스라엘 형제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10절에서 자신들을 확실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정말 확실하고 신실한 사람인지 테스트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실함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베냐민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형들로 하여금 베냐민의 소중함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야곱과 같은 위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마다 하나님의 섭리와 깊은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연히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는 섬김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가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요셉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용서와 화해, 겸손과 섬김을 실천하며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일오후설교 250615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본문: 42: 18-38

제목: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통치

 

I. 서론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7년간 풍년 때에 창고를 지어 곡식을 잘 보관하였다가 이어서 온 7년간의 흉년때에 애굽백성들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곡식을 사러 왔을 때 그들에게 곡식을 판매했습니다. 그 중에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야곱의 아들들이 드디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 10명을 당장 알아보았지만 그들은 요셉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애굽을 엿보러 온 정탐꾼이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가족사를 이야기 합니다. 12명의 야곱의 아들들 중에 한 사람은 없어졌고 막내아들 베냐민은 아버지와 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요셉은 그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려면 너희 중 한사람을 보내어 그 아우를 데려오고 나머지는 갇혀 있으라고 하면서 사흘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뒷이야기가 계속되는데 요셉을 통해 그 형제들을 회개시키고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만날 사람을 만나야 행복해진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멀리 떠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외로움과 불안, 두려움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능력도, 찾아 갈 수 있는 길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야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습니다. 모든 불안, 염려, 외로움이 변하여 감격과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 화해하기 전에는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요셉도 자기를 배신한 형들을 만나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 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이 그를 배신한 형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근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하나님은 그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축복이나 고난도 모두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다 하나님의 섭리이며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8: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고통, 저주, 손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모든 저주와 고통조차 축 복으로 승화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생애 자체가 복이요, 우리가 겪는 고난조차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드디어 요셉은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가나안 땅에 사는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고난속에서도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성령이 역사하면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기근 때문에 양식을 사러 애굽에 와서 요셉총리 앞에 엎드려 절을 하게 됩니다. 요셉이 17세에 꾼 꿈이 실제로 성취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들이 애굽 상인에게 팔았던 동생 요셉이 바로 그들 앞에 애굽총리로 서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22년의 세월을 흘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보지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만지실 때 들을 수 있는 귀와 느낄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자신이 꾼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나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당장 드러내지 않고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였습니다. 429,12,14,16절에서 네 번이나 집요하게 형들을 밀어붙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 막내동생을 데려온다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난처해졌습니다. 형들은 그 말을 아버지 야곱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가족 내부문제를 애굽총리인 요셉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처럼 정확하고 결정적인 정곡을 찌르는 문제를 던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이 가서 막내동생을 데려오면 믿어주겠다고 해놓고 사흘동안 형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요셉이 형들의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테스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테스트하려고 한 것은 과연 베냐민을 자신들의 진정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3일 지나고 나서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라고 했습니다. 형들에게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힌트를 준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므로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지금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과정을 걷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본문 18절에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했습니다. 19-20절에 보면 한명만 보내고 나머지는 감옥에 가두어 두려던 계획을 바꾸어서 반대로 한명만 감옥에 남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식구들의 굶주림을 면하도록 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니 그 중에 시므온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시므온이 대신 인질로 잡힌 것입니다. 이제 시므온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는 것 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이 베냐민에게 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형들의 마음을 고치려고 했던 이유였습니다. 이전에 형들은 요셉 하나 쯤이야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베냐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만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베냐민의 미래도 상당히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의 존망이 베냐민의 안녕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여기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요셉의 조치로 형들은 이제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하는 사명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3일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기억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라고 후회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22년 전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넣었을 때 요셉이 형들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는데 그것을 외면했던 과거를 지금 자기들이 당한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죄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딜렘마에 빠질수록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죄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이 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진땀나는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숨어 있는 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해결받고 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미움, 분노, 한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복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형들이 고난당한 이유를 세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형들은 요셉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요셉사건은 영원히 묻혀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깊어지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끝나고 맙니다.

 

둘째,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것이 범죄라고 고백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복의 시작입니다. 반면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을 자기들끼리 스스로 이야기 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요셉의 형들은 현재 자신들이 받고 있는 고난이 과거에 요셉이 당한 고통을 되돌려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일이 막히고 잘 안될 때 그 배후에 영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일이 없습니까? 가해자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준 고통이나 상처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받은 상처를 오래 기억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면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들이 받은 고난의 이유입니다. 기근이 있고, 정탐꾼으로 몰리고, 감옥에서 사흘동안 갇히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와야 하는 난제를 만남으로써 요셉의 형들이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참회와 회개의 복입니다. 만일 그때 요셉이 형들을 미리 아는 체 했다면 이 문제는 묻히고 말았거나 피상적인 해결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최대위기가 바로 이 피상성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깊이가 없고 감정적이고 신뢰성이 없는 피상적인 신앙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회개의 깊이는 신앙의 깊이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서운 죄악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지 않고 단지 몇마디로 끝내버리는 데 그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성범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남편 우리아 장군을 적진 가장 앞으로 나가 싸우도록 하여 결국 전사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이러한 자기 죄를 지적하자 통회자복하며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32:1-4절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서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죄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다윗은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손이 밤낮으로 자기를 누르고 있어서 뼈가 녹고 혈액과 수액으로 된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뼈가 쇠하도록 피가 마르도록 그는 철저히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깊이 묵상하다가 51: 5절 말씀처럼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 가운데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과 뿌리까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오늘 본문 22절로 돌아오면 루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 것을 보고 형들에 대한 한이 많이 풀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그들을 떠나 혼자 실컷 울고 나왔습니다.

 

여기서 피값이란 말이 나옵니다. 진짜 피값을 치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도 우리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루우벤은 지금 자기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때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요셉을 사지로 몰았던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냐고 후회하면서 형제들에게 원망을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자 형들은 자신들의 과거 요셉에게 행한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을 요셉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통역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나님이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앉고 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24-25절에 보면 요셉은 그들의 말을 듣고 혼자 들어가 울고 나와서 그들 중에 시므온을 그들 앞에서 결박하여 데려가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곡물을 자루에 채워주고 각 사람이 곡식사러 가지고 온 돈도 도로 그들 자루에 넣도록 하인들에게 시킵니다.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만 겉으로는 형들을 아주 엄하게 다룹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엄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마치 잘못한 아이를 다루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다루실 때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아시지만 스스로 깊은 참회를 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버리고 성숙한 신앙인격체로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뒤돌아 서서 우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이 눈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진심과는 달리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형들에게는 곡식을 잔뜩 자루에 넣어주고 돈도 도로 주었으며 길 가다가 먹을 음식까지 챙겨주었습니다. 형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돌아가는 길에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다가 자루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본문 28절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점점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가 자기들이 겪은 일을 소상하게 아버지 야곱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자기들이 정탐꾼으로 몰릴 위기에 처했음을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랐고, 자루에 든 돈뭉치를 보고 더 놀라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야곱은 요셉과 시므온도 없어졌고, 이제 베냐민도 빼앗아 가고자 한다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루우벤이 시므온과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자기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하면서 반드시 그들을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맹세를 하며 아버지를 안심시키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야곱이 영적 안목이 전혀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 계획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자기 아들을 잃을 것을 생각하고 또 다른 아들을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만나게 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인데 야곱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지 못하고 단지 자기와 아들에 대한 육신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낙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지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복된 사건입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믿음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사건이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복으로 변합니다.

 

지금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을 고통으로 해석하고 있고 막내아들 베냐민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인간적인 공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시는 것은 베냐민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베냐민을 통해 야곱의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야곱이 요셉과 재회하게 하시고 그들을 영광의 자리에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형들에게 고백하였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메어있었다면 형들에 대한 보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들을 무조건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용서는 자칫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위험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의 통치자로 세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크게 손상된 이스라엘 형제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10절에서 자신들을 확실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정말 확실하고 신실한 사람인지 테스트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실함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베냐민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형들로 하여금 베냐민의 소중함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야곱과 같은 위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마다 하나님의 섭리와 깊은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연히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과 이웃을 사랑하는 섬김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가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요셉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용서와 화해, 겸손과 섬김을 실천하며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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