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6: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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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10-08 |
수요설교 251008
본문: 갈6:11-18
제목: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I.서론
이제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직접 쓴 목회서신입니다. 그 만큼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얻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간 성도들의 상황이 긴박하고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갈라디아서의 결론부분입니다. 그 결론으로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율법주의자들의 마음
본문 11절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때 빛을 쳐다보다가 눈이 멀게 되었고 그후 3일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함으로 눈에 비늘깥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일로 인해 평생 시력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쓸 때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시키고 마지막 문안부분만 친히 씀으로 그 글이 자기가 쓴 것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오늘 본문 11절처럼 큰 글씨로 직접 쓴 것입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성도들이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바울사도직에 대한 의문을 품게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케 하여 믿음이 흔들릴 때 갈라디아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이 바른 믿음에 서도록 간절한 심정으로 친필로 큰 글씨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본문에서 악한 마음의 자세와 선한 마음의 자세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본문 12,13절은 악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란 할례를 받아야 구원얻는다고 말하는 거짓선생을 말하는데 그들은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고 칭찬을 받으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주장하는 그들이 겉으로는 율법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정작 율법은 지키지 않고 율법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자랑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할례를 그 예로 듭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할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유대주의자들에게 비난이나 박해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할례받았다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반대를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들의 칭찬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례라는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선포하면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할례를 받았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과 행위를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려고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서 할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종교다원주의가 교회에 파고들어와서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면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 종교를 믿든지 그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대로 믿기만 하면 다 구원받는다는 논리를 주장하여 교인들을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믿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면서 세상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적당히 타협하며 생활하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타협주의를 단연코 배격해야 합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밑에서 자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우리를 낮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공로가 벌거벗겨졌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골고다 길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것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칭찬에 노예가 된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길을 거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도덕성을 자랑의 도구로 이용하고 사람들의 칭찬을 갈구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특징은 요일2: 15-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떠난 세상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자랑하는 바울은 그런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처럼 자신이 교회에 봉사와 헌신을 잘하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은근히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예수 믿는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적당히 타협하며 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서 오늘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의 마음
본문 14,15절은 선한 마음의 자세를 밝히고 있습니다.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옛 마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때 생기는 일입니다. 그는 죽음에서 일으켜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새생명, 거듭난 생명이 된 것입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인데 실제로 바울이 갈2:20절에 고백한 내용입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사신다고 했습니다. 이 새로운 바울은 날마다 그리스도께 의존하며 살아가는 바울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살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본문 15절에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바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의 마음 자세는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로 기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므로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하거나 못 받았다고 실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자만이 가치가 있고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3. 십자가만 자랑하라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가지로 보여줍니다.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힘으로써 그동안 세상의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체처럼, 쓰레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한편, 세상사람들이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나를 볼 때도 나를 시체처럼, 쓰레기처럼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고 헛된 삶을 산다고 취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세상을 거부하고 세상도 바울을 거부한다고 말한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헬라의 쾌락주의나 유대의 율법주의의 세상이 바울에게 제시하는 쾌락과 지위나 명예는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거대한 쓰레기 더미요 배설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실상과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할 때 ’이 규례‘란 14-15절에 묘사된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의 마음자세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12,13절의 율법주의자들의 자신을 높이는 마음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 마음자세는 자신을 높이는 자들과 네가지로 대조됩니다.
첫째,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하기 때문에 종교의식 속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에 비하여 사람들의 칭찬이 주는 기쁨은 쓰레기 더미라고 여깁니다.
둘째,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사람들의 박해와 거절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세상의 박해를 받아들입니다. 바울은 고후 12:10절에서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피난처요 방패이며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기를 높이는 자들은 할례와 같은 외적인 종교형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들은 내적인 새창조를 신앙의 본질로 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들은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넷째, 자기를 높이는 자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만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들은 그 십자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기도의 기초이고, 하나님 사랑의 보증이며, 용서와 소망의 근거요 평안과 긍훌이 흘러나오는 샘입니다. 16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종교와 철저하게 다른 구원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선이나 덕을 세울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모든 도덕이나 윤리나 세상 종교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합니다. 하나님도 자기 행위로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에 감동을 받아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기 행위를 자랑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땅에서 고난의 삶을 사시고, 죽으시면서 이루어 놓은 구원의 온전한 공로를 통해 우리는 믿음으로 아무 공로없이 하나님의 용서와 모든 복과 은총을 값없이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3:27절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랴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했습니다. 엡2:8-9절에도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성도들이 십자가를 자랑할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헬라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자기 생명도 구원하지 못하는 존재가 온 세상의 메시아라고 전하는 것이니 어리석고 미련해 보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꺼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메시아라고 선포하니 유대인들은 마음에 큰 걸림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든 성도가 하나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순교하기 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사도바울은 수많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좋은 가문과 혈통을 가지고 탁월한 선생, 세계적인 석학 밑에서 배워 학벌도 최고였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수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살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모든 자랑거리를 내려놓고 고전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보증이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롬8:32절에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크신 사랑의 보증과 현장이 십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총의 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과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쳐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용서와 소망과 평안과 긍휼이 흘러나오는 샘의 근원입니다.
셋째, 십자가 위에서 진실한 승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처럼 싸워서 이기거나 다른 사람을 누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질고와 허물과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는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거쳐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문을 여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가 장차 주님과 함께 사망을 이기는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방식으로 이기면 오징어 게임 드라마처럼 결국 같이 죽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4절에서 세상이 나를 향하여 죽고 내가 세상을 향해 죽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승리가 십자가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세웠지만 가장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는 어느 교회보다 가장 큰 애착을 두고 있었는데 그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 할례문제 등으로 혼선을 빚게 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와해시키고 순수한 믿음을 교란시키려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심한 고통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한 것은 마치 노예나 가축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그 주인의 이름을 새긴 인두를 불에 달구어 낙인을 찍듯이 자신의 몸에 예수 이름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것입니다.바울은 예수 때문에 수없이 맞았던 채찍의 흔적,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태장으로 맞고, 수없이 맞으면서 몸에 남은 그 고난의 상처가 낙인처럼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할례로 인해 몸에 받은 조그만 흔적을 자랑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온몸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고난과 박해의 상처를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18절에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아멘”이라는 인사말로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 비록 큰 고통과 상처를 준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애정어린 호칭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 구원의 의미를 함축한 말로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과 은혜 때문임을 일깨우기 위한 마지막으로 축도한 것입니다. 아멘이 축도에 들어있는 것은 본서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결론부분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유혹함으로 많은 성도들이 넘어졌는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바울이 친필로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밝힌 것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은 새로 지음을 받은 거듭난 사람, 새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축복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하시는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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