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갈2: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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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7-02 |
수요설교 250702 믿음으로 의롭게 됨
본문: 갈2:11-16
제목:믿음으로 의롭게 됨
I. 서론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갈2:1-10에서 복음의 진리가 위험에 처한 것은 할례라는 주제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가 할례라는 행위를 통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사건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내용입니다.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인 베드로와 바울이 유대인의 음식규례 때문에 충돌한 사건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사건이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안디옥 사건
사도행전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령도 낮고, 사도도 더 늦게 된 후배입니다. 그런데 공개석상에서 선배인 베드로를 꾸짖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베드로를 그 앞에서 직접 책망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12절에 나옵니다. “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이 오자 식사자리에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먹다가’라는 동사는 미완료시제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일회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습관을 보여 주는 동사입니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자주 습관적으로 먹기를 즐겼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 음식문화에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금하는 음식규례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00가지가 넘는 정결규정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70% 정도가 음식과 관련된 규례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되는 음식이 있고, 어떤 사람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되는지에 대한 규례도 있습니다. 당시 음식법과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을 무시하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더럽히는 죄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절대로 식탁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함께 먹기를 좋아했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10장에 보면 가이샤라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찾아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행10:11-14절의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구약성경에서 부정하다고 선언한 각종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 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고넬료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그에게 가니 그도 환상 중에 사람을 보내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해서 지금 당신을 초청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모여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가 설교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을 보고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고 유대인의 절기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단지 믿음으로 복음을 들음으로써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베드로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경험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행10:34-35절을 보면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진실로 믿음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주시고 교회 안으로 받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자 거리낌 없이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 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12,13절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남은 유대인들도 그와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요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란 야고보 사도가 직접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라 야고보의 친구들이거나, 예루살렘에서 결정된 사도의 판결문을 가져왔거나, 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으로 방문한 유대인 성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오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혹시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보고 문제 삼으면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받은 사명에 지장이 생기고, 예루살렘의 보수적 유대신자들의 반발을 사서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높은 위상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순간에 이방인 형제들과 식탁교제를 중단합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하니까 남은 유대인 성도들뿐 아니라 바나바까지도 똑같이 식탁교제에서 물러났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같이 1차 전도여행을 다니며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나바까지 베드로를 따라 슬그머니 물러난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상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존경하던 베드로 사도가 우리를 이렇게 대하다니 예수를 믿어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역시 차별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본 바울이 책망한 내용이 14절에 나옵니다. “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도 유대인의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복음과는 상관없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진실하게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주시며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고넬료 사건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과의 식사자리에서 물러감으로써 스스로 가르치고 선포한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어기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배 사도인 베드로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여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책망한 것입니다. 책망은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망만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바른 행동의 대안을 제시해야 진정한 충고이고 책망이 됩니다. 바울을 책망한 후에 16절에서 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모두 한 형제요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2.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외식과 율법주의는 복음과 불일치 함
베드로는 할례자 유대인 성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복음과 일치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은 두려움을 낳지 않습니다. 딤후1: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히13:6절에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일시적인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잘못을 행하는 자녀들을 은혜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베드로에게 보내셔서 베드로가 다시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바나바,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물러간 것은 위선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원칙을 버리면서까지 할례자들의 비난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 위선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모든 위선의 뿌리는 두려움이나 불안입니다. 불안은 복음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서 외식하고 싶어지고 자신이 믿는 바를 신앙을 말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위선을 물리치고 복음을 믿기 위한 싸움입니다. 외식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볼 때 사람을 두려워하고 쉽게 위선을 행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삶의 중심에 예수님의 복음이 있으면 위선의 뿌리가 뽑힐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나님과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베드로에게 한 말은 “네가 사도로서 이방인 형제들과 식탁교제를 하지 않고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 형제들도 너와 같이 한다면,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강요나 다름없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복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받을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의지할 때만 죄용서와 기쁨, 평안과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복음의 진리와 일치되는 삶을 만들어 냅니다.
3. 교회가 가르치는 사랑과 교제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베드로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고 공개적으로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사랑은 너도 좋고 나도 좋고가 아니라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인 진리를 가진 사랑입니다. 복음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참 신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책망하는 순간에도 원수처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바르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책망해야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야고보가 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논쟁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 자리를 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진리가 왜곡되거나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생명의 값을 치르더라도 타협하거나 뒷걸음질 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남들이 자기와 같아지기를 요구합니다. 교회는 모든 성별, 신분, 능력, 소속이 달라도 그 구분을 뛰어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 깊고 진실한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는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사도가 이방인의 교제에서 뒷걸음질 쳐서 유대인이 되어야만 교제가 가능한 것처럼 편견과 차별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허물은 논쟁과 오해를 피하기 위해 타협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교회의 본질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왜곡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하자 베드로 같은 인물이라도 책망한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생명은 사람들의 지위나 신분이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유능하거나 재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내면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유대인처럼 억지로 이방인들을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고, 예수 믿는 복음과 그 진리만이 교회 안에 넘쳐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세상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4. 복음의 핵심
바울은 교회가 왜곡시킬 수 있는 복음에 대해 다시 한번 선명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16절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뿐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 앞부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1,2장 앞부분에서 이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그 은혜라는 말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라고 다시 새롭게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들’이란 이방인들을 말하다가 뒤에 ‘우리’는 이란 말은 바울 자신과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입니다. 즉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선뜻 ‘아멘’이라고 동의가 되는지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그래도 아직 남들과 비교해 볼 때 평균 정도는 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자신의 밑바닥을 아직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길이 열렸다고 해도 그렇게 감격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들도 여전히 일반 사람들과 같이 사람을 상대적인 외적 조건의 비교를 통해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고 악하고 무익한 존재인지 보지 못하기 때문에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 복음에 큰 기쁨이나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을 말씀으로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저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자신의 부패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만일 디도가 예루살렘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했다면, 또는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 유대인의 음식규례를 지켜야 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효가 되고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믿는 성도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게 하는 위선적 행동, 외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이 복음에 다른 행위로 구원받는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성도 간에 차별없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혹시 성도 간에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바르게 충고하고 대안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복음의 원칙을 지키고 그 결과를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 속에서 인간적 성취보다 하나님이 주권적이고 값없는 은혜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수요설교 250702 믿음으로 의롭게 됨
본문: 갈2:11-16
제목:믿음으로 의롭게 됨
I. 서론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갈2:1-10에서 복음의 진리가 위험에 처한 것은 할례라는 주제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이었던 디도에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가 할례라는 행위를 통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사건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내용입니다.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인 베드로와 바울이 유대인의 음식규례 때문에 충돌한 사건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사건이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안디옥 사건
사도행전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령도 낮고, 사도도 더 늦게 된 후배입니다. 그런데 공개석상에서 선배인 베드로를 꾸짖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베드로를 그 앞에서 직접 책망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12절에 나옵니다. “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이 오자 식사자리에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먹다가’라는 동사는 미완료시제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일회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습관을 보여 주는 동사입니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자주 습관적으로 먹기를 즐겼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 음식문화에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금하는 음식규례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00가지가 넘는 정결규정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70% 정도가 음식과 관련된 규례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되는 음식이 있고, 어떤 사람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되는지에 대한 규례도 있습니다. 당시 음식법과 정결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을 무시하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더럽히는 죄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절대로 식탁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주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함께 먹기를 좋아했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10장에 보면 가이샤라에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찾아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행10:11-14절의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구약성경에서 부정하다고 선언한 각종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 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고넬료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그에게 가니 그도 환상 중에 사람을 보내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해서 지금 당신을 초청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모여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가 설교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을 보고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고 유대인의 절기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단지 믿음으로 복음을 들음으로써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베드로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경험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행10:34-35절을 보면 “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진실로 믿음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주시고 교회 안으로 받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자 거리낌 없이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 그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12,13절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남은 유대인들도 그와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요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란 야고보 사도가 직접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라 야고보의 친구들이거나, 예루살렘에서 결정된 사도의 판결문을 가져왔거나, 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으로 방문한 유대인 성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오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혹시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보고 문제 삼으면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받은 사명에 지장이 생기고, 예루살렘의 보수적 유대신자들의 반발을 사서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높은 위상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순간에 이방인 형제들과 식탁교제를 중단합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하니까 남은 유대인 성도들뿐 아니라 바나바까지도 똑같이 식탁교제에서 물러났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같이 1차 전도여행을 다니며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나바까지 베드로를 따라 슬그머니 물러난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상황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존경하던 베드로 사도가 우리를 이렇게 대하다니 예수를 믿어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역시 차별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상처를 크게 받았을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본 바울이 책망한 내용이 14절에 나옵니다. “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도 유대인의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복음과는 상관없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진실하게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주시며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고넬료 사건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과의 식사자리에서 물러감으로써 스스로 가르치고 선포한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어기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책망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배 사도인 베드로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여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책망한 것입니다. 책망은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망만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바른 행동의 대안을 제시해야 진정한 충고이고 책망이 됩니다. 바울을 책망한 후에 16절에서 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모두 한 형제요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2.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외식과 율법주의는 복음과 불일치 함
베드로는 할례자 유대인 성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복음과 일치되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은 두려움을 낳지 않습니다. 딤후1: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히13:6절에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일시적인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잘못을 행하는 자녀들을 은혜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베드로에게 보내셔서 베드로가 다시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바나바,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물러간 것은 위선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원칙을 버리면서까지 할례자들의 비난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 위선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모든 위선의 뿌리는 두려움이나 불안입니다. 불안은 복음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서 외식하고 싶어지고 자신이 믿는 바를 신앙을 말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위선을 물리치고 복음을 믿기 위한 싸움입니다. 외식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볼 때 사람을 두려워하고 쉽게 위선을 행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삶의 중심에 예수님의 복음이 있으면 위선의 뿌리가 뽑힐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나님과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베드로에게 한 말은 “네가 사도로서 이방인 형제들과 식탁교제를 하지 않고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 형제들도 너와 같이 한다면,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강요나 다름없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복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받을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의지할 때만 죄용서와 기쁨, 평안과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복음의 진리와 일치되는 삶을 만들어 냅니다.
3. 교회가 가르치는 사랑과 교제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베드로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고 공개적으로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사랑은 너도 좋고 나도 좋고가 아니라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인 진리를 가진 사랑입니다. 복음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참 신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책망하는 순간에도 원수처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바르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책망해야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야고보가 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논쟁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 자리를 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진리가 왜곡되거나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생명의 값을 치르더라도 타협하거나 뒷걸음질 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남들이 자기와 같아지기를 요구합니다. 교회는 모든 성별, 신분, 능력, 소속이 달라도 그 구분을 뛰어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 깊고 진실한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는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사도가 이방인의 교제에서 뒷걸음질 쳐서 유대인이 되어야만 교제가 가능한 것처럼 편견과 차별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허물은 논쟁과 오해를 피하기 위해 타협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교회의 본질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왜곡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하자 베드로 같은 인물이라도 책망한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생명은 사람들의 지위나 신분이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유능하거나 재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내면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하나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유대인처럼 억지로 이방인들을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 않고, 예수 믿는 복음과 그 진리만이 교회 안에 넘쳐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세상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4. 복음의 핵심
바울은 교회가 왜곡시킬 수 있는 복음에 대해 다시 한번 선명하게 선을 긋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에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16절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뿐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 앞부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1,2장 앞부분에서 이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그 은혜라는 말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라고 다시 새롭게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들’이란 이방인들을 말하다가 뒤에 ‘우리’는 이란 말은 바울 자신과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입니다. 즉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선뜻 ‘아멘’이라고 동의가 되는지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그래도 아직 남들과 비교해 볼 때 평균 정도는 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자신의 밑바닥을 아직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길이 열렸다고 해도 그렇게 감격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들도 여전히 일반 사람들과 같이 사람을 상대적인 외적 조건의 비교를 통해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고 악하고 무익한 존재인지 보지 못하기 때문에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 복음에 큰 기쁨이나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을 말씀으로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저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자신의 부패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만일 디도가 예루살렘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했다면, 또는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 유대인의 음식규례를 지켜야 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효가 되고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믿는 성도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게 하는 위선적 행동, 외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이 복음에 다른 행위로 구원받는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성도 간에 차별없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혹시 성도 간에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바르게 충고하고 대안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복음의 원칙을 지키고 그 결과를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 속에서 인간적 성취보다 하나님이 주권적이고 값없는 은혜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복음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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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 믿음으로 의롭게 됨 | 갈2:11-16 | 2025-07-02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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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그리스도의 복음 | 갈1:1-5 | 2025-06-04 | 홍기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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