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설교본문 | 요18: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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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4-16 |
수요설교 250416 베드로의 배반
본문:요18:12-27
제목: 베드로의 배반
I. 서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심문받는 내용입니다. 가룟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은 30을 받고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대와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하여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밤 중에 끌고 가서 심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자기가 심문해도 예수님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의 사위인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인계합니다. 가야바가 70인 공회를 소집하여 새벽에 불법으로 심문하는데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 가야바의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
본문 12,13절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의 맏아들이 대제사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직분은 정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든지 교회가 로마와 결탁하여 안나스라는 사람이 자기가 대제사장을 하고 자기 다섯 아들에게 돌아가면서 일년씩 제사장을 시키고 나서 시킬 사람이 없으니 사위인 가야바까지 대제사장을 시켰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 당시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가더라도 현직 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고 가야하는데 그의 장인 안나스에게 먼저 심문하러 갔다는 것은 실권이 안나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는데 “ 이 사람에게서 표적이 나타나니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가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의논할 때 가야바가 요11:50절에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는 예수님을 우리나라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러면 로마가 쳐들어와 우리나라가 망하게 될 것인데 그런 일이 터지기 전에 저 예수를 먼저 처리해버리면 나라가 조용해 질 것이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머리로 이런 말을 했는데 알고 보면 한 분 예수님이 죽음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살게 된다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그 원수의 입을 통해 말한 예언이 된 것입니다. 요11:51,52절에 보면 ”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고 그 말을 해석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15절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외에 또 다른 제자 하나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사도요한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까지 따라 간 사람이 사도요한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실 때도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동생 집에서 모신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이 모셨습니다.
이 사도요한은 안나스 대제사장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안나스 대제사장 뜰에서 심문받으실 때 ”나도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여기 들어가야 된다“고 말하며 들어갔는데 그들은 요한에게 ”너가 예수님의 제자이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이 사도요한 처럼 어디서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 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기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깃발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흔히 직장생활을 할 때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실 때가 있는데 처음부터 교인이라고 밝히면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지만 분위기 따라 함께 마시면 나중에는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해도 가짜 교인취급만 받습니다. 음주 뿐 아니라 말씀과 어긋나는 사회적 관행을 따라야 할 때도 기독교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선택이 됩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대로 저의 제자 겸 후배가 대기업에서 이사승진 기회가 있었는데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승진에서 탈락된 적이 있었지만 그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성과를 내는 것을 눈 여겨 본 회장이 오히려 그를 전격 발탁해서 중국공장의 공장장으로 승진시켰다는 간증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불이익이 있을 줄 알면서도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낼 때 오히려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전도의 문을 여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믿는 깃발을 분명히 하고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할 때 세상문화를 기독문화로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2.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함
본문16절에 ”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라“고했습니다. 사도요한의 소개로 베드로도 예수님의 심문장소에 같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라고 첫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26:58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문결과를 보려고 멀찍이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이 탄로나면 죽임을 당할까 겁이 나서 멀찍이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지기 여종이 거의 반 농담조로 물어 본 말에 지레 겁을 먹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눅22: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사탄이 너희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33절에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34절에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에게 ”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 의지와 자신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그분에게 의탁하고 도움을 구하는 신앙이어야 사탄에게 속아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들었으면 베드로는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근신해야 했는데 그는 자신감 하나만 믿고 있다가 문지기 여종의 반농담에도 지레 겁을 먹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8절에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서서 쬐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4월인데 아침 저녁으로 쌀쌀할 때가 많듯이 당시 유대나라도 4월이지만 밤에는 쌀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재판을 보려고 갔으면 재판 받는 곳 가까이 가서 보아야 할 텐데 뒤에서 멀찌기 숨어서 마치 그 하속들과 같은 무리로 위장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본문 19-21절에서는 안나스 전대제사장이 묻는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제자들의 행방과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쳤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디 갔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고, 무엇을 가르쳤느냐에 관해서는 회당과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들은 사람이 많으니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왔던 말씀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가르친 것 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교훈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냐는 것과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과 이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당당히 밝히시기 바랍니다.
본문 22,2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 아랫사람 하나가 대제사장의 물음에 예수님이 들은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불손하게 대답했다고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뺨을 맞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에 보니 이렇게 안나스가 심문을 해도 예수님에게 책잡을 것이 없으니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현재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보냅니다. 안나스 뜰과 가야바 뜰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습니다. 25-27절은 보면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니 그 불빛에 그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니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너도 그 제자 중의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또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이 꼼짝없이 탄로나자 세 번째로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하고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합니다. 거짓말을 하는데 맹세까지 해가며 강하게 부인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예언처럼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3. 회개한 베드로
가룟유다는 예수를 배신했고,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심판을 받았고, 베드로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겉보기에는 배신과 부인이 비슷한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두 사람을 가른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요6:69절에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마16: 16절에서도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잘못을 했을지라도 그의 신앙고백은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은 비록 중간에 잘못했더라도 회개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처음부터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요6:70절에 예수님께서 유다를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둘째,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의도성과 우발성입니다. 가룟유다는 도둑이었기에 삶의 지향점이 예수님과 달라서 기본적으로 배반이 그의 인격 속에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배반은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신앙고백도 진실했고, 요13:37절에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는 결기도 진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요한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는데 그래도 예수가 심문받는 현장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을까요?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결기를 보일 때 그러한 결기가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적 의리만으로는 그 결기를 지킬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행동을 조심해야 했는데 정작 자기가 위험에 처하자 그 위험을 피하고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분명히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위해 죽기로 결단한다 해도, 삶의 현장에서 비록 조그만 일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예수 부인은 우발적인 것이었기에 그는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눅22:61-62절을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21:15-17절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나서 그에게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세 번 긍정하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중간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길을 돌이키면 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바울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최고의 제자들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이 예수를 부인하거나 박해한 죄인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깨닫고 회개함으로 주님의 올바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주님을 배반한 자라는 의식없이 의인인 척하는 사람은 정말로 죄인이고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 후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것도 눅22:32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4. 예수님의 당당한 순종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던 그때에 예수님은 대제사장을 지낸 안나스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공식 대제사장은 그의 사위 가야바였지만 실제 권력은 안나스가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은 먼저 안나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두가지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첫째, 요18:11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대제사장의 심문과 십가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가룟유대처럼 배반의 길도, 베드로처럼 부인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홀로 순종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당당하게 이 길을 가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가 쓸데없이 자신과 제자들에 대해 심문하려 하지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자신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공공연하게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 한 것이 없는데 어찌 내게 묻느냐 들은 자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자세장의 아랫사람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가하자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당당하게 꾸짖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 맞서는 당당한 모습은 비굴하거나 미워하거나 교만한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미움을 버리지 않은 채 분노를 삭이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하려면 당당해져야 합니다. 상대방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되받아쳐 공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미움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당당한 행동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베드로가 이렇게 실패했던 것을 보며 몇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첫째, 준비에 실패하면 역사에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전도, 선교, 봉사할 때도 말씀과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준비해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주님을 따르려면 멀찍이 따라가지 말고 바짝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출석이나 예배나 전도나 봉사나 주님의 일을 할 때 뒤에 멀찍이 따라가지 말고 남에게 양보하지 말고 열심히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마귀가 역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있을 때 실패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실패 한데서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하고 회복한 후에 다른 형제를 붙잡아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하고도 연약해서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기 쉽습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나처럼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실패 경험이 있는 사람이 실패한 사람에게 말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베드로처럼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타협하지 말고 깃발을 분명히 하십시오.
내가 불리할 때 안 믿는 척하는 것은 베드로가 불을 쬐며 예수의 제자가 아닌 척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정직하고 분명하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깃발을 분명히 드시기 바랍니다. 소극적으로 나가면 마귀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처럼 당당한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므로 그 고통을 인내하며 자원하여 그 길을 가셨는데 당당하게 가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흑암 세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가면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베드로의 회개와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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