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설교본문 | 창3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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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홍기칠 목사 |
설교일 | 2025-05-04 |
주일오후설교 250504 복의 통로가 된 요셉
본문: 창39:1-6
제목: 복의 통로가 된 요셉
I. 서론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애굽에 내려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면서 이 땅에서 성도들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II.본론
1. 요셉에게 닥친 고난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희망에 부푼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왕자처럼 산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애굽으로 팔려 가서 남의 집 종이 되었습니다. 이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최악의 상황에 떨어진 요셉을 도울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요셉 자신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잘 못했기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해답은 요셉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 고난의 해답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문제의 실마리라도 하나 제공해주신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훗날 요셉이 30세가 되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었지만, 지금 요셉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그토록 착한 사람이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왜 뜻하지 않게 죽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 고난과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질문은 “요셉은 수많은 집중에서 왜 애굽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가게 되었을까?”라는 것입니다. 그 해답도 보디발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과 바로 왕의 만남을 위한 통로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봅니다. 모든 섭리와 애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지나온 모든 과거의 해답은 한가지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성공과 실패와 좌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다가올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위해서’가 그 해답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나의 과거였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다 내것이 됩니다. 인생이 무척 흥분되고, 재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전도용 소책자 사영리의 제1원리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전체의 요약이자 핵심입니다. 요10: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할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면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땅의 삶이 더 풍성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현재의 고난의 원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2. 매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생애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난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날마다, 매순간 마다 성도들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르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통치 하시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셉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셉이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고 그 하나님을 언제나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은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매순간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이나 어려움도 그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지나놓고 보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앞길은 만사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유다와 요셉의 생애
39장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이 유다와 아주 큰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다가 형제를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 갔듯이, 요셉도 그 형제를 떠나서 애굽사람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차이점은 유다는 자발적으로 형제를 떠났고, 요셉은 억지로 떠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스스로 음행에 빠져 다말과 동침하게 되었지만 요셉은 자신을 지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겨냅니다. 유다의 아내는 두 아들을 잃고 자신도 죽게 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지만,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오히려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요셉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도 오히려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긴 하지만 땅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복을 누리는 것은 장소나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다와 요셉의 삶의 차이가 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단서가 바로 본문 2절에 나와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 궁극적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창39장부터 50장까지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요셉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니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그가 옥에 갇힌 후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21절에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강조되고 있는데 ,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옥중에서도 다른 죄수들과 구별되어 다스리는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드러낸 요셉
요셉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셉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이방인에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함께 하심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주관적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애굽 사람이었던 보디발도 볼 수 있었던 가시적인 것이 었습니다. 3절을 보면 “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 그리고 보디발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육신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삶이 밖으로 증거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요셉은 자신이 비록 형들에게 팔렸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겨우 17세 정도의 소년입니다. 형들에게 완전히 배신당하여 아주 먼 나라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형제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관점으로 설명해 봅시다. 어떤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가 성도들과 목사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아서 교회서 쫓겨 났습니다. 그리고 남쪽 섬에서 혈혈단신 먹과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과연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대학에 가면서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경우가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기 보다 오히려 대학의 문화를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그가 장차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으로 가기 전에 이 사실을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었고, 요셉은 그 계시를 분명히 붙들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을 높이 들어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적어도 요셉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애굽 땅에서도 요셉은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요셉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큰 도전을 줍니다. 한국에서 교회마다 신자들로 가득차 있지만 실제 삶속에서 신자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가시적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는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만약 하나가 있다면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나마 제대로 하는 신자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점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겉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보더라도 자신들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알도록 생활합니다. 입는 옷, 먹는 음식, 행동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확실하게 표가 납니다. 이 점에서 개신교와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기독교인은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동료가 교인이라근 것을 아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불신자들이 알 수도 없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습니다. 흔히 기업 사장이 기독교인보다 비기독교인을 더 신뢰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복의 통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증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6.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에게 복을 내리심
보디발은 요셉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그가 모든 일에 형동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성공했고, 그 성공은 누가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은 가정총무로 자기 집을 다시리게 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이제 보디발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요셉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5절을 보시면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율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몇가지를 주목하게 되는데 5절은 복의 시점, 복의 범위, 그리고 복의 근거를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과 소유를 주관하기 시작한 때부터 하나님의 복이 임하였고 그복은 보디발에게 속한 모든 것에 미쳤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 이유가 요셉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셉 때문에 보디발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요셉은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요셉을 통하여 보디발이 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이땅에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데만 너무 많은 힘과 재정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어떤 지역에 교회가 들어서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합니다. 교회가 들어서면 교통량이 많아지고, 주변이 시끄럽고, 땅값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을 향해 열린 복의 통로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을 사수하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교회는 복의 통로였습니다. 한국이 미개한 나라였을 때 교회는 수많은 학교를 세워서 백성들을 교육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많은 병원들이 건립되었습니다. 이런 기관들을 통해 신자들은 물론이고 불신자들도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교회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그 결과 교회는 점점 왕성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응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불신자들 중에서 성도들을 통하여 복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 이런 소리가 많이 들려야 할 것입니다. “ 저 직원 때문에 우리 회사가 참 많은 유익을 얻고 있구나” “ 저 사장 때문에 우리 직원들이 참으로 행복하구나”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점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하게 됩니다. 요셉은 노예로 있으면서 종의 일에 충성하였고, 감옥에 가서는 죄수로서 충성을 다하였고, 총리로 있을때에도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살고 있던 집이 복을 받았고, 함께 갇혔던 죄수들이 복을 받았고, 나중에 애굽 전체가 복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도 흉년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복의 본질은 누군가를 복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뿐 아니라 자기가 섬기던 보디발의 집에도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그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이 있는 곳마다 우리 때문에 주변이 복을 받는 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는 데 마다, 하는 일 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복이 임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보람있겠습니까? 요셉은 종이면서 주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장과 세상에서 요셉처럼 산다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의 리더십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세상에서 성도가 어떤 존재여야 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성도는 세상을 위한 복의 통로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복의 통로로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지위에 있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우리가 가진 빛을 비취게 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바로 우리의 선한 행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어떤 상황이던지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로가 되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주일오후설교 250504 복의 통로가 된 요셉
본문: 창39:1-6
제목: 복의 통로가 된 요셉
I. 서론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애굽에 내려가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면서 이 땅에서 성도들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II.본론
1. 요셉에게 닥친 고난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희망에 부푼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왕자처럼 산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애굽으로 팔려 가서 남의 집 종이 되었습니다. 이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최악의 상황에 떨어진 요셉을 도울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요셉 자신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잘 못했기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해답은 요셉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 고난의 해답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문제의 실마리라도 하나 제공해주신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훗날 요셉이 30세가 되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었지만, 지금 요셉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그토록 착한 사람이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왜 뜻하지 않게 죽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 고난과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질문은 “요셉은 수많은 집중에서 왜 애굽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가게 되었을까?”라는 것입니다. 그 해답도 보디발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보디발이 요셉과 바로 왕의 만남을 위한 통로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를 봅니다. 모든 섭리와 애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지나온 모든 과거의 해답은 한가지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성공과 실패와 좌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다가올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위해서’가 그 해답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나의 과거였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다 내것이 됩니다. 인생이 무척 흥분되고, 재미있고,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전도용 소책자 사영리의 제1원리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전체의 요약이자 핵심입니다. 요10: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할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면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땅의 삶이 더 풍성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현재의 고난의 원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2. 매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생애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난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날마다, 매순간 마다 성도들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르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통치 하시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셉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셉이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고 그 하나님을 언제나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은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매순간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이나 어려움도 그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지나놓고 보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앞길은 만사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유다와 요셉의 생애
39장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이 유다와 아주 큰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다가 형제를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 갔듯이, 요셉도 그 형제를 떠나서 애굽사람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차이점은 유다는 자발적으로 형제를 떠났고, 요셉은 억지로 떠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스스로 음행에 빠져 다말과 동침하게 되었지만 요셉은 자신을 지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겨냅니다. 유다의 아내는 두 아들을 잃고 자신도 죽게 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지만,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오히려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요셉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도 오히려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긴 하지만 땅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복을 누리는 것은 장소나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다와 요셉의 삶의 차이가 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단서가 바로 본문 2절에 나와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 궁극적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창39장부터 50장까지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요셉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니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그가 옥에 갇힌 후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21절에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강조되고 있는데 , 이 이유 때문에 요셉은 옥중에서도 다른 죄수들과 구별되어 다스리는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드러낸 요셉
요셉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요셉의 믿음이 구체적으로 이방인에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함께 하심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주관적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애굽 사람이었던 보디발도 볼 수 있었던 가시적인 것이 었습니다. 3절을 보면 “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 그리고 보디발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육신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삶이 밖으로 증거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요셉은 자신이 비록 형들에게 팔렸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겨우 17세 정도의 소년입니다. 형들에게 완전히 배신당하여 아주 먼 나라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형제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관점으로 설명해 봅시다. 어떤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가 성도들과 목사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아서 교회서 쫓겨 났습니다. 그리고 남쪽 섬에서 혈혈단신 먹과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과연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대학에 가면서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경우가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기 보다 오히려 대학의 문화를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그가 장차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으로 가기 전에 이 사실을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었고, 요셉은 그 계시를 분명히 붙들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을 높이 들어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적어도 요셉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애굽 땅에서도 요셉은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요셉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큰 도전을 줍니다. 한국에서 교회마다 신자들로 가득차 있지만 실제 삶속에서 신자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가시적으로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는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만약 하나가 있다면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나마 제대로 하는 신자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점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겉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보더라도 자신들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알도록 생활합니다. 입는 옷, 먹는 음식, 행동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확실하게 표가 납니다. 이 점에서 개신교와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기독교인은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동료가 교인이라근 것을 아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불신자들이 알 수도 없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습니다. 흔히 기업 사장이 기독교인보다 비기독교인을 더 신뢰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복의 통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증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6.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에게 복을 내리심
보디발은 요셉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고, 또한 그가 모든 일에 형동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성공했고, 그 성공은 누가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은 가정총무로 자기 집을 다시리게 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이제 보디발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요셉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5절을 보시면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율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몇가지를 주목하게 되는데 5절은 복의 시점, 복의 범위, 그리고 복의 근거를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과 소유를 주관하기 시작한 때부터 하나님의 복이 임하였고 그복은 보디발에게 속한 모든 것에 미쳤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 이유가 요셉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셉 때문에 보디발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요셉은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요셉을 통하여 보디발이 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이땅에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데만 너무 많은 힘과 재정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어떤 지역에 교회가 들어서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합니다. 교회가 들어서면 교통량이 많아지고, 주변이 시끄럽고, 땅값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을 향해 열린 복의 통로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을 사수하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교회는 복의 통로였습니다. 한국이 미개한 나라였을 때 교회는 수많은 학교를 세워서 백성들을 교육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많은 병원들이 건립되었습니다. 이런 기관들을 통해 신자들은 물론이고 불신자들도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교회는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고 그 결과 교회는 점점 왕성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응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불신자들 중에서 성도들을 통하여 복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 이런 소리가 많이 들려야 할 것입니다. “ 저 직원 때문에 우리 회사가 참 많은 유익을 얻고 있구나” “ 저 사장 때문에 우리 직원들이 참으로 행복하구나”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점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하게 됩니다. 요셉은 노예로 있으면서 종의 일에 충성하였고, 감옥에 가서는 죄수로서 충성을 다하였고, 총리로 있을때에도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살고 있던 집이 복을 받았고, 함께 갇혔던 죄수들이 복을 받았고, 나중에 애굽 전체가 복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도 흉년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복의 본질은 누군가를 복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뿐 아니라 자기가 섬기던 보디발의 집에도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그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이 있는 곳마다 우리 때문에 주변이 복을 받는 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는 데 마다, 하는 일 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복이 임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삶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보람있겠습니까? 요셉은 종이면서 주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장과 세상에서 요셉처럼 산다면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의 리더십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세상에서 성도가 어떤 존재여야 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성도는 세상을 위한 복의 통로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복의 통로로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지위에 있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우리가 가진 빛을 비취게 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바로 우리의 선한 행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어떤 상황이던지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로가 되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번호 | 제목 | 설교본문 | 설교일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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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복의 통로가 된 요셉 | 창39:1-6 | 2025-05-04 | 홍기칠 목사 |
52 | 다말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 창38:1-30 | 2025-04-27 | 홍기칠 목사 |
51 |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 창32: 12-36 | 2025-04-13 | 홍기칠 목사 |
50 | 요셉의 꿈 | 창37:1-11 | 2025-04-06 | 홍기칠 목사 |
49 | 에서의 후손 | 창36: 1-43 | 2025-03-30 | 홍기칠 목사 |
48 | 20250316 주일오후설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창35: 1-29) | |||
47 | 20250302 주일오후설교 (야곱가정의 위기/ 창34:1-31) | |||
46 | 20250223 주일오후설교 (야곱과 에서의 화해/창33: 1-20) | |||
45 | 20250216 주일오후설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창32:13-32) | |||
44 | 20250209 주일오후설교 (문제를 만나면/창32:1-12)섥 | |||
43 | 20250202 주일오후설교 (화해의 돌기둥/창31:43-55) | |||
42 | 20250119 주일오후설교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야곱/창31:1-42) | |||
41 | 20250112 주일오후설교 (야곱에게 품삯을 챙겨주신 하나님/창30:25-43) | |||
40 | 20250105 주일오후설교 (열두지파를 세우신 하나님/창29:31-30:24) | |||
39 | 20241229 주일오후설교 (예수를 배반한 가룟유다/요13: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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