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설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
2025-04-23 09:54:43
홍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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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요20:1-18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4-20

주일오전설교250420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

본문:20: 1-18

제목: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

 

I. 서론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부활기사입니다. 부활은 20, 21장에 걸쳐 나오는데 복음서 부활기사 중에는 가장 많은 분량입니다. 본문 1절에 안식 후 첫날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주간의 첫날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요,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새로운 날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신 한 주간의 시작일인 일요일 즉,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이 거짓이면 기독교도 거짓입니다. 부활이 사실이기에 우리의 믿음이 복된 것이지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는 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실히 믿을 수 있어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담대하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부활신앙에 필요한 요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본론

1. 빈 무덤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기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앞서 빈 무덤기사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해가 질 때까지 시체를 나무 위에서 그대로 달아 놓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밤 자정 0시부터 다음날 자정인 0시 까지로 계산하지만,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 까지로 계산합니다. 즉 금요일 오후 해가 지면 토요일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이 금요일 오후 3시였는데 7시경 해가 진다고 하면 불과 4시간의 시간적 여유밖에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장례를 허락받아오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시체는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피가 흘렀고, 등에는 채찍에 맞아 살점이 뜯어졌고, 무릎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오며 넘어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양손과 발은 못에 박혀 찢어졌고, 옆구리는 로마 병사들의 창에 찔려 물과 피가 흘렀고,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왔을 수도 있는 그런 처참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피투성이 온몸을 닦아내고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백근 정도의 방부제 향료를 수의 사이에 넣어 시체를 다 감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대충 수의를 감아 무덤에 넣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그렇게 대충 싸메어 무덤에 넣는 것을 본 여인들 중에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는 비록 시신이지만 정성껏 모시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무덤에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 못하고 다음 주일날 새벽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향을 가지고 가서 다시 예수님의 시신을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린 빈 무덤 뿐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으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덤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인들로 알려진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등은 모두 그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인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누구나 부인하지 못합니다. 28:12-15절을 보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숨기려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매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은 제자들이 시신을 도둑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거나,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고 말하거나,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 간절히 사모해서 정신착란으로 환상을 보았다는 등의 엉터리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빈 무덤을 보고 즉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전했습니다. 성질급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요한은 급히 무덤을 향해 달려갔는데 젊은 요한이 조금 더 빨리 도착하여 무덤을 보니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무덤에 들어가지 못하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뒤늦게 베드로가 도착하여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세마포로 감고 머리는 터번과 같은 수건으로 동여맸던 것 같습니다. 그때야 요한도 들어가 보고 빈 무덤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그리고 요한 세 사람은 모두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세 번이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빈 무덤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시키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빈 무덤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16:1절을 보면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인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를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귀신이 들려 미치광이 같은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 귀신들을 내쫓아 주셔서 완전히 치유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 누구보다 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 여인의 생각 속에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시체 절도가 유행했는데 마리아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고 전했는데 여기 사람들이란 아마도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대제사장 무리나 불특정 시체 절도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절도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하려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상상합니다. 마리아도 그런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베드로 역시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인 것을 보았는데, 만약 마리아의 생각대로 시체절도단 소행이라면 시체에서 옷을 벗겨서 정돈해 놓고 시체를 훔쳐간다고 하는 것은 엽기적 행동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조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님으로부터 이전에 많이 들었음에도 막상 예수님의 무덤을 보고는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상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선뜻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요한은 본문 8절에 베드로를 따라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더라는 말은 본문 9절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히 믿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본문 9절에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 빈 무덤에 들어가보고 믿었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것을 믿었다기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 광경을 보고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각각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이 세 사람이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은 당시에는 그 누구도 정말 예수가 부활할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20:19-20절에 보면 예수님 부활 후에 성령수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구약말씀을 아직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각각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본 후에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예수부활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에 갑니다. 그녀가 예수님 시체에 향유를 더 바르기 위해 갔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마리아의 말을 듣고 급하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훼손당했다고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간 것입니다. 요한의 경우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으로 달려 갔습니다.

 

이처럼 세 사람은 모두 경험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모르고 아직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믿으려면 성령을 체험해야 새롭게 보입니다. 이들이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연상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의 부활도 자신의 부활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본문 11-14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가버린 그 무덤가에 서서 울면서 그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는데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지 못하고 그 시체가 도둑맞았다는 생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보니 예수님이 거기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아리마대 요셉 소유의 정원을 돌보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주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본문 16절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당시 통용되던 아람어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마리아는 그 음성이 바로 평소에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임을 퍼뜩 깨닫고 너무 반가워서 역시 아람어인 랍오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최고의 선생이나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었던 선생님이여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양이었기 때문에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 순간 너무 반가워서 선생님!” 하면서 그 예수님께 와락 달려가 안겨 펑펑 울고 싶었는데 17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와락 달려가 안기려 하다가 그 말씀을 듣고 멈칫했습니다. 그러나 기쁘고 반가워서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울다가 웃다가 어찌할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마리아는 지금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8: 9절을 보면 그 여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자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본문의 이 말씀과 모순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수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뜻은 내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고, ’나에게 계속 붙어있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문맥에 더 맞는지 논란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 17절에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부활소식을 전하라고 부탁하신 것으로 볼 때 계속 해서 나에게 붙어 있지말고 부활의 증인으로 떠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개인적인 친분상태가 아니라 영광의 최종적인 상태로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해야하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계속 함께 계실 것을 바라고 붙잡으려는 개인적이고 감정적 행동을 중지하고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다른 여자들도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들도 보았습니다. 500여명의 성도들도 예수님을 보았고, 끝까지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바닷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도 나누었습니다. 1:3절을 보면 많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앉아서 40일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증인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려 40일 동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인 실제 사건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수많은 성도들을 핍박했지만 주후 313년 로마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세계만방으로 이 부활소식이 증거되어 현재 전 세계 80억 인구의 32%가 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본다는 말은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아무나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실 때만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눈을 열어주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신령한 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도 직접 눈으로 그 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믿음의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말씀을 펴놓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그분과 온갖 계획과 소원을 아뢰며 대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까? 날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 보고 대화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날마다 보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 눈물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 울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의 죽음을 슬퍼했고 또 시체가 없어졌기에 슬퍼한 것입니다. 그 울음은 곧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해서 일곱귀신이 떠나가는 치유의 역사를 경험한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기도 가운데 눈물이 있습니까?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우리 마음 전체를 드리는 간절한 기도 가운데 눈물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눈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여 그 마음이 메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두려움이 변하여 용기가 되는 경험을, 도마는 의심이 변하여 믿음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변화를 체험합니다. 벧전1:8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느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 할 수 없은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에서 늘 기쁨이 솟아나고 생명의 환희가 넘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6: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새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영원히 살게 됩니다.

 

고전15:22, 23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는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에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하여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천지만물을 다스리시고 우리들의 모든 삶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재림의 날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영원한 하늘나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형벌로 다스리시게 됩니다. 이 땅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받고 고난 당하던 모든 성도들의 눈물을 완전히 씻기시고 영화로운 몸으로 우리도 부활하게 하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보고, 해석하고, 해답을 얻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형제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말합니다. 부활을 믿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성도들의 아버지시고 모든 성도들은 형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교회에서 맛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들은 바로 이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을 돌보며 부활의 증인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전적으로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한 예수님이 그녀에게 나타나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부활주일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고, 우리와 성령으로 동행하심을 믿고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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