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2025-04-23 10:51:22
홍기칠
조회수   11
설교본문 창32: 12-36
설교자 홍기칠 목사
설교일 2025-04-13

주일오후예배 250413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본문: 37: 12-36

제목: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I. 서론

지난 주 창37:1-11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두 차례 꾸고나서 그 꿈이 형들과 부모님들과 관련된 꿈이라 그들에게 그 꿈의 내용을 이야기한 내용이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는 것 때문에 그를 미워했는데 꿈의 내용도 자기들과 아버지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으니 더욱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그 요셉의 꿈을 마음에 간직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이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어떤 고난을 당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그 꿈을 이루어가도록 섭리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요셉의 순종과 고난

참된 꿈은 언제나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겪게 됩니다. 17세 소년 요셉이 동일한 내용의 꿈을 두 번 꾸게 되자 그 꿈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그것을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길을 걷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말을 하게 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과정은 보이지 않으나 그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걸어갑니다.

 

본문 12-14절을 보면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 야곱이 요셉에게 그 곳에 가서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지 보고 와서 말해달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세겜은 야곱이 있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로 떨어진 먼 거리이고 애굽과는 정반대 방향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세겜으로 보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세겜은 야곱의 자녀들에게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였고 시므온과 레위가 그곳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복수한 곳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양들을 기르기에 좋다고 세겜 땅으로 간 것입니다. 야곱은 그 아들들이 혹시 세겜 사람들의 공격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낸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내가 그리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바로 순종하고 길을 떠납니다. 자기 혼자 그 멀리 위험한 곳을 다녀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80km를 당시에 걸어갔다고 생각하면 며칠이 걸리는 거리가 됩니다. 아마도 그 먼 길을 가서 열명의 형들을 만나야 하니 볶은 곡식과 무화과 말린 것 등의 음식을 싸서 메고 갔을 것입니다.

 

6:8절에도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했을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고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가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명령했습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강하게 비치는 광선 때문에 눈이 멀었지만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후 그는 20:23-24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는 기본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이사야와 바울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며 남은 생애 동안 나에게 주신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부모 말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말에 순종했지만 형들은 그렇지 못했는데 여기에 야곱이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실책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형제들 간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15-17절을 보니 요셉이 그 먼 세겜 땅으로 형들을 찾아 갔지만 그들을 만나지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겜 땅의 어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자기 형들을 찾는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형들이 여기서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은 얼마 전에 그의 형들로 부터 자신들이 당했던 피해를 요셉에게 보복할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겜 사람은 오히려 요셉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 형들이 간 곳이 도단이라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요셉을 환대하는 세겜사람과 요셉을 죽이려고 한 형들이 대비가 됩니다. 이 또한 요셉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또다시 20km를 더 가야 합니다. 요셉은 하루 길을 걸어 도단까지 가서 드디어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을 알게 되면 될수록 순종을 더 발전시켜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말씀을 깨달은 만큼 순종해 나가면 나갈수록 더 구체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2. 형들의 죄악

요셉이 멀리서 다가오자 형들은 그를 반갑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 꿈 꾸는 자가 온다라고 말하며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 꿈에 대해 늘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꿈꾸는 자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져넣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는 음모를 꾸밉니다. 죄를 짓기 전에 죄를 숨길 계획까지 했으니 아주 악한 범죄를 도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대로 두셨다면 아마 요셉은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장자 루우벤이 요셉을 구하려고 그들에게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그냥 던져넣기만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하여 시간을 번 후에 형제들이 없을 때 그를 구출해서 돌려보낼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우벤이 하나님 뜻을 깨달았으면 진실되게 순종해야 합니다. 직접 죽이지 말고 굶어 죽도록 하자며 거짓으로 위장하여 형제들을 안심시켜 놓고 나중에 요셉을 살려줘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악한 자들에게 말려들게 됩니다. 결국 그 말을 듣고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물이 솟아나는 샘이 아니라 빗물을 저장하는 구덩이인데 중동지방에서 이런 구덩이가 많다고 합니다. 그 구덩이는 위는 좁고 밑은 넓게 파 놓았기 때문에 스스로 올라오기는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웅덩이에 요셉을 던져 넣은 것입니다.

 

이들이 왜 요셉을 미워했습니까? 시기,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사랑받거나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 그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질투로 인한 미움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요일3: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는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투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사랑을 헤아려 범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3. 요셉의 고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본문 25절에서 36절 내용을 보면 그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을 만납니다. 그러자 유다가 양심에 걸려 제안을 합니다. 요셉을 죽이지 말고 저 상인들에게 팔면 그를 죽이지 않고도 미운 놈을 보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께는 요셉이 죽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범행을 모의합니다. 그때 장자 루우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그 말에 동의하고 요셉을 은 20개를 받고 그 대상들에게 팔아버립니다. 27:5절을 보면 5세에서 20세 까지 남자이면 그 값을 20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10세겔로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린 것은 완전한 성인이기 때문에 그랬고 20세까지는 은 20이니 요셉을 제값을 받고 판 셈이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10명이었으니 한 사람이 은 2개씩 나누면 딱 맞습니다.

 

그때 루우벤이 돌아와 보니 동생이 애굽 상인들에게 팔려가고 없었습니다. 루우벤은 통곡했습니다. 요셉을 몰래 살려보낼려고 했는데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루우벤은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기 보다는 침묵함으로써 동생들의 범죄를 묵인한 것입니다. 루우벤에겐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책임과 함께 끝까지 동생 요셉을 지켜야 하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본문 30절에 아우들에게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꼬라고 했습니다. 장자로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장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오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요셉의 옷을 죽인 수염소의 피에 적시고 그것을 아버지 야곱에게 가져가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이 오다가 보니 이 옷을 발견했는데 요셉의 옷이 아닌가 보라고 합니다. 동생을 팔아먹은 것도 큰 죄인데 그 죄를 숨기기 위해 능청스럽게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낳아 자꾸 더 커지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의 옷을 보고 그 아들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요셉이 들짐승에 잡아먹혔다고 생각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랫동안 죽은 아들을 애도하며 애통했습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지옥을 말할 때도 있고 무덤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야곱이 스올로 내려가겠다는 말은 나도 죽어야 되겠다고 한탄하는 말입니다. 사실 야곱은 세겜에서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일 때 한번 속았고, 이번에 두 번째로 다시 완전하게 속았습니다. 야곱이 속은 것은 야곱의 과거를 상기시켜 줍니다. 자신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염소 새끼를 죽이고 그 가죽으로 손과 목에 두르고 형의 옷을 입고 아버지이삭에게 들어가 별미를 만들어 드리면서 그를 속였습니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야곱은 아들들에게 완전히 속은 것입니다. 야곱은 복을 받았으나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산 그 상인들이 그를 애굽의 바로왕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이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녀들이 요셉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요셉을 그 형들에게 홀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을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가든지 함께 갔을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장자 루우벤도 지도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에게 주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한 요셉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할까요? 우리도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합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되면 억지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봐야 압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면 그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세상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하며 체념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습니다. 놀랍게도 요셉이 팔려간 곳은 애굽왕 친위대장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 즉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고난의 파도에 밀려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요셉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야곱과도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4가지 사건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왜 형들이 요셉을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큰형 루우벤이 괴로워하니까 요셉을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형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죽일 수도 있었는데 요셉을 살려둔 것입니다.

둘째, 왜 바로 그 시간에 마침 이스마엘 상인들이 그 곳을 지나갔을까요?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요셉이 팔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 왜 갑자가 유다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했는데 은 20개를 받고 팔았을까요? 넷째,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왜 하필이면 애굽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이 모든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손길이 그때 그때 요셉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어떻게 은혜를 주시는지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그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때 사람을 보내시거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엄청난 복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서곡이 요셉에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이 30세가 될 때 애굽총리로 세우실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집이 아니라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애굽왕 바로와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섭리인 것입니다. 이방민족의 노예가 강대국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길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비상한 방법 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인도가 인간의 배반과 간악함을 통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 방해해도 하나님의 섭리는 바꿀 수 없습니다.

 

37장에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번도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끌어 가실 때 두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 인도하십니다. 다음에 볼 창38장에서는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의 죄에 대해서는 즉시 죽음의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섭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이에 해당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무도 요셉이 애굽왕의 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갈 것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3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아주 엄숙한 언약을 맺으면서 35:13-14절에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하여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밝혀져 그 나라가 애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기 전에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시기와 질투로 요셉의 꿈을 허망하게 만들려고 그를 죽이려 하다가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의 후손인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합니다. 질투와 시기로 인하 미움은 살인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죄입니다. 죄는 또 다른 죄악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말씀으로 비춰보며 회개하고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하심을 믿고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 가운데도 언제나 세밀하게 섭리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시고 새롭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일오후예배 250413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본문: 37: 12-36

제목: 요셉의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I. 서론

지난 주 창37:1-11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두 차례 꾸고나서 그 꿈이 형들과 부모님들과 관련된 꿈이라 그들에게 그 꿈의 내용을 이야기한 내용이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는 것 때문에 그를 미워했는데 꿈의 내용도 자기들과 아버지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으니 더욱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그 요셉의 꿈을 마음에 간직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이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어떤 고난을 당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그 꿈을 이루어가도록 섭리하시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본론

1. 요셉의 순종과 고난

참된 꿈은 언제나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겪게 됩니다. 17세 소년 요셉이 동일한 내용의 꿈을 두 번 꾸게 되자 그 꿈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그것을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길을 걷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말을 하게 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과정은 보이지 않으나 그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걸어갑니다.

 

본문 12-14절을 보면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칠 때 야곱이 요셉에게 그 곳에 가서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지 보고 와서 말해달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세겜은 야곱이 있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로 떨어진 먼 거리이고 애굽과는 정반대 방향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세겜으로 보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세겜은 야곱의 자녀들에게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였고 시므온과 레위가 그곳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복수한 곳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양들을 기르기에 좋다고 세겜 땅으로 간 것입니다. 야곱은 그 아들들이 혹시 세겜 사람들의 공격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낸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내가 그리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바로 순종하고 길을 떠납니다. 자기 혼자 그 멀리 위험한 곳을 다녀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80km를 당시에 걸어갔다고 생각하면 며칠이 걸리는 거리가 됩니다. 아마도 그 먼 길을 가서 열명의 형들을 만나야 하니 볶은 곡식과 무화과 말린 것 등의 음식을 싸서 메고 갔을 것입니다.

 

6:8절에도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했을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고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가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명령했습니다. 바울은 하늘로부터 강하게 비치는 광선 때문에 눈이 멀었지만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후 그는 20:23-24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는 기본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도 요셉과 이사야와 바울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며 남은 생애 동안 나에게 주신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부모 말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말에 순종했지만 형들은 그렇지 못했는데 여기에 야곱이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실책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형제들 간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15-17절을 보니 요셉이 그 먼 세겜 땅으로 형들을 찾아 갔지만 그들을 만나지 못하고 들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겜 땅의 어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자기 형들을 찾는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형들이 여기서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은 얼마 전에 그의 형들로 부터 자신들이 당했던 피해를 요셉에게 보복할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겜 사람은 오히려 요셉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 형들이 간 곳이 도단이라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요셉을 환대하는 세겜사람과 요셉을 죽이려고 한 형들이 대비가 됩니다. 이 또한 요셉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또다시 20km를 더 가야 합니다. 요셉은 하루 길을 걸어 도단까지 가서 드디어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는 상황을 알게 되면 될수록 순종을 더 발전시켜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말씀을 깨달은 만큼 순종해 나가면 나갈수록 더 구체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2. 형들의 죄악

요셉이 멀리서 다가오자 형들은 그를 반갑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 꿈 꾸는 자가 온다라고 말하며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 꿈에 대해 늘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꿈꾸는 자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져넣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는 음모를 꾸밉니다. 죄를 짓기 전에 죄를 숨길 계획까지 했으니 아주 악한 범죄를 도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대로 두셨다면 아마 요셉은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장자 루우벤이 요셉을 구하려고 그들에게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그냥 던져넣기만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하여 시간을 번 후에 형제들이 없을 때 그를 구출해서 돌려보낼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우벤이 하나님 뜻을 깨달았으면 진실되게 순종해야 합니다. 직접 죽이지 말고 굶어 죽도록 하자며 거짓으로 위장하여 형제들을 안심시켜 놓고 나중에 요셉을 살려줘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악한 자들에게 말려들게 됩니다. 결국 그 말을 듣고 형제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 구덩이는 물이 솟아나는 샘이 아니라 빗물을 저장하는 구덩이인데 중동지방에서 이런 구덩이가 많다고 합니다. 그 구덩이는 위는 좁고 밑은 넓게 파 놓았기 때문에 스스로 올라오기는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웅덩이에 요셉을 던져 넣은 것입니다.

 

이들이 왜 요셉을 미워했습니까? 시기,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사랑받거나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 그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질투로 인한 미움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요일3: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는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투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와 사랑을 헤아려 범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3. 요셉의 고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본문 25절에서 36절 내용을 보면 그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을 만납니다. 그러자 유다가 양심에 걸려 제안을 합니다. 요셉을 죽이지 말고 저 상인들에게 팔면 그를 죽이지 않고도 미운 놈을 보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께는 요셉이 죽었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범행을 모의합니다. 그때 장자 루우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그 말에 동의하고 요셉을 은 20개를 받고 그 대상들에게 팔아버립니다. 27:5절을 보면 5세에서 20세 까지 남자이면 그 값을 20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10세겔로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린 것은 완전한 성인이기 때문에 그랬고 20세까지는 은 20이니 요셉을 제값을 받고 판 셈이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10명이었으니 한 사람이 은 2개씩 나누면 딱 맞습니다.

 

그때 루우벤이 돌아와 보니 동생이 애굽 상인들에게 팔려가고 없었습니다. 루우벤은 통곡했습니다. 요셉을 몰래 살려보낼려고 했는데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루우벤은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하기 보다는 침묵함으로써 동생들의 범죄를 묵인한 것입니다. 루우벤에겐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책임과 함께 끝까지 동생 요셉을 지켜야 하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본문 30절에 아우들에게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꼬라고 했습니다. 장자로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장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오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요셉의 옷을 죽인 수염소의 피에 적시고 그것을 아버지 야곱에게 가져가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이 오다가 보니 이 옷을 발견했는데 요셉의 옷이 아닌가 보라고 합니다. 동생을 팔아먹은 것도 큰 죄인데 그 죄를 숨기기 위해 능청스럽게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낳아 자꾸 더 커지게 됩니다.

 

야곱은 요셉의 옷을 보고 그 아들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요셉이 들짐승에 잡아먹혔다고 생각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랫동안 죽은 아들을 애도하며 애통했습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지옥을 말할 때도 있고 무덤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야곱이 스올로 내려가겠다는 말은 나도 죽어야 되겠다고 한탄하는 말입니다. 사실 야곱은 세겜에서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일 때 한번 속았고, 이번에 두 번째로 다시 완전하게 속았습니다. 야곱이 속은 것은 야곱의 과거를 상기시켜 줍니다. 자신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염소 새끼를 죽이고 그 가죽으로 손과 목에 두르고 형의 옷을 입고 아버지이삭에게 들어가 별미를 만들어 드리면서 그를 속였습니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야곱은 아들들에게 완전히 속은 것입니다. 야곱은 복을 받았으나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산 그 상인들이 그를 애굽의 바로왕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이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녀들이 요셉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요셉을 그 형들에게 홀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을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가든지 함께 갔을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장자 루우벤도 지도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에게 주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간직한 요셉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할까요? 우리도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합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되면 억지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봐야 압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면 그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세상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하며 체념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습니다. 놀랍게도 요셉이 팔려간 곳은 애굽왕 친위대장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 즉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고난의 파도에 밀려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요셉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야곱과도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4가지 사건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왜 형들이 요셉을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큰형 루우벤이 괴로워하니까 요셉을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형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죽일 수도 있었는데 요셉을 살려둔 것입니다.

둘째, 왜 바로 그 시간에 마침 이스마엘 상인들이 그 곳을 지나갔을까요?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요셉이 팔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 왜 갑자가 유다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했는데 은 20개를 받고 팔았을까요? 넷째,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왜 하필이면 애굽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이 모든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손길이 그때 그때 요셉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어떻게 은혜를 주시는지 영적인 민감성을 가지고 그 상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때 사람을 보내시거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엄청난 복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서곡이 요셉에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이 30세가 될 때 애굽총리로 세우실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집이 아니라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애굽왕 바로와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섭리인 것입니다. 이방민족의 노예가 강대국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길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비상한 방법 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인도가 인간의 배반과 간악함을 통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 방해해도 하나님의 섭리는 바꿀 수 없습니다.

 

37장에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번도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끌어 가실 때 두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 인도하십니다. 다음에 볼 창38장에서는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의 죄에 대해서는 즉시 죽음의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섭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이에 해당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무도 요셉이 애굽왕의 친위대장의 집으로 팔려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갈 것을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3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아주 엄숙한 언약을 맺으면서 35:13-14절에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하여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밝혀져 그 나라가 애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기 전에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III. 적용 및 실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시기와 질투로 요셉의 꿈을 허망하게 만들려고 그를 죽이려 하다가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의 후손인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합니다. 질투와 시기로 인하 미움은 살인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죄입니다. 죄는 또 다른 죄악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말씀으로 비춰보며 회개하고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하심을 믿고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 가운데도 언제나 세밀하게 섭리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시고 새롭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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